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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책 이야기

“인지부조화, 나도 예외는 아니다!” 전상진의 「세대 게임」 서평, 두 번째...

by Back2Analog 2018. 1. 26.

얼마전 전상진의 「세대 게임」을 읽고 서평 아닌 서평을 하나 올린 적이 있다. 

"지금까지의 세대 논리는 모두 잊어라!" 전상진의 「세대 게임」 (링크 클릭)

오늘은 지난번에 올린 부족한 글에 이어 본격적으로 서평이라는 걸 한번 써 ‘보고’자 한다. 사실 지금까지 제대로 서평을 써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며칠동안 제대로 서평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어찌보면 그 강박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내가 이 서평을 쓰는 목적이다.

책 표지

출판사의 사장이나 편집자라면 모를까, 책을 별로 읽지 않는 나 같은 불량 독자의 입장에서 표지는 책을 선택하는 데 그닥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살면서 표지에 끌려 책을 구입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에게 있어서 표지란 주로 책을 다 읽고 난 후 완독의 뿌듯함을 되새김질 하는 용도다. 이번에도 그 어려운 전상진 교수의 책을 완독했다는 뿌듯함을 되새김질 하기 위해 책의 표지를 음미해 보았다. 찬찬히  뜯어보니 꽤 재미가 있다. 세대의 문제를 ‘전쟁’이 아닌 ‘게임'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강한 의도가 보인달까? 일단 전체적인 형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카드 이미지를 페러디했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를 ‘기성세대’와 ‘청년’으로 나누었다. 기성세대는 차와 집, 사랑과 가족, 모든 것을 가졌다. 반면 소위 N포 세대라고 불리는 청년은 차도, 집도, 사랑도, 가족도 가지지 못했다. 책의 좌측 상단과 우측 하단에 있는 G는 당연히 generation(세대)의 약자일 것으로 추정한다. 워밍업은 이정도로 하고...


책 구성

「세대 게임」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의 꼴을 갖추기 위해 일단 그 구성을 소개한다.


들어가며

1장 의심하고 주저하기

2장 나이와 경험 - 세대를 정의하는 두 가지 기준

3장 청년은 비참하고 노년은 화려하다 - 청년과 노년의 이미지 변화

4장 세대 전쟁 - 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결

5장 시간의 고향 - 세대 정체성의 중요한 닻

6장 세대 투쟁 - 시간의 실향민이라는 정치 세대의 등장

7장 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7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나는 「세대 게임」을 두 개의 덩어리로 나누었다. 1장부터 4장에서 “세대 전쟁”에 대해 다뤘다면, 두번째 덩어리인 5장과 6장은 “세대 투쟁”을 다룬다. 7장은 「세대 게임」의 정리와 결론이다. 책을 읽기 전 독자라면 “세대 전쟁”과 “세대 투쟁”이라는 분류가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도식화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세대 게임 = 세대 전쟁 + 세대 투쟁

전상진은 세대 게임을 연령을 기준으로 정책 갈등을 벌이는 “비난의 세대 게임”과 세대 정체성을 중심으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는 “지지자 세대 게임”으로 분리해 설명한다. 앞서 올린 글이 비난의 세대 게임, 즉 세대 전쟁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주로 지지자 세대 게임을 다룬 5장과 6장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정체성을 둘러싼 세대 투쟁, 지지자 세대 게임

비난의 세대 게임이 강 건너 불이라면, 지지자 세대 게임은 이미 신념이 된 나의 가치와 당위에 직접 불을 지른다. 그리고 한 마디의 날카로운 논리가 내 심장을 정면으로 겨눈다. 내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두 세대 게임의 구분 기준인 ‘연령'과 ‘정체성'이 가지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① 행위자 세대가 다름 : 연령 세대는 피동적(사회 정책은 그 대상자를 연령에 따라 구분), 정체성 세대는 능동적(세대 정체성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세대에 속한다는 자각과 의식, 경우에 따라 행동까지 필요)
② 대결의 대상이 다름 : 연령 세대는 정책을 두고 갈등, 정체성 세대는 상이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투쟁
③ 대결의 강도와 지속성이 다름 : 연령 세대는 소속이 변함에 따라 지속성 약화, 정체성 세대는 강렬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세대 투쟁에 임함. (p. 282 요약)


5장, ‘시간의 고향’에서는 먼저 정치적 세대 투쟁의 주체인 세대 정체성에 대해 살핀다. 


"세대 정체성은 ‘당신들은 누구요’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답변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우리는 누구이고자 한다’라는 기대나 주장을 담는다. 역사의 우연의 굴곡 속에서 어떤 또래 집단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선후배 집단과 구별되는 고유한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그것을 의식할 때 비로소 그들을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세대라 부른다." (p. 147)


‘또래 집단’, ‘선후배’, ‘구별’이라는 단어를 통해 세대 정체성은 시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5장의 제목처럼 세대 정체성은 현재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의 고향’을 중심으로 형성이 된다. 나는 평소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주장해 왔다. 기억은 현실에 놓인 상황에 따라 편집되고, 편의적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난 우리 부모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현실의 내가 효자면 과거의 잘못된 행동도 용서가 되고, 현실의 내가  불효자면 과거의 선행도 불효로 매도가 된다. 세대 정체성의 형성도 비슷하다. 잠재되어 있던 과거의 향수, 또는 트라우마가 현재의 상황에 따라 재해석된다.


"경제・정치 위기에 직면하면 박정희 향수가 짙어지지만(경제 발전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정치 혼란을 깔끔하게 정리한 박정희 대통령), 민주주의가 후퇴한다고 인식하면 향수가 옅어지면서 독재자 박정희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그것의 기초가 되는 경험과 기억과 사회화의 결과를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기회 구조와 환경, 특히 경제 난관과 민주주의 가치의 훼손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p. 250)


박정희 얘기가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아직도 오매불망 박정희를 잊지 못하는 맞불 시민들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저자 전상진은 맞불 시민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진단하기 위해 6장, ‘세대 투쟁’에 4장, 세대 전쟁(60쪽)보다 많은 86쪽의 분량을 투자한다. 맞불 시민의 행동을 이해(?)하고 진단하기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인지부조화 이론’이다. 



인지 부조화 이론 認知不調和理論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등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자신의 인지를 변화시켜 조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주장. (다음 사전)



"이론과 현실이 자꾸 어긋날 때 이론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현실에 맞게 이론을 수정하든가, 아니면 이론의 완전무결함을 믿으며 현실을 부정하든가. 코르슈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내 이론이 잘못된 게 아니라 현실이 미친 거야.'

맞불 시민을 보면서 느낀 실망을 나는 코르슈의 방식으로 해결했다.‘사람들이 박 대통령 같은 거짓말쟁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는 기대와 ‘거짓말쟁이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현실의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내 기대를 현실에 맞게 점검하고 수정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까닭을 알아냈어야 했다. 진실과 거짓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투표나 지지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내 기대를 고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사상이 아니라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내 생각을 더 정교하게 만들기 보다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단정함으로써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했다. ‘맞불 시민은 모두 무식한 멍청이일 뿐이야.’“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본인과 비교할 수 없도록 특별한 속성을 부여하”는 관찰자들이 다행스럽게도 또는 안타깝게도 적지 않다. 나만 게으른 건 아니라는 다행스러움, 하지만 나 외에도 그런 편한 해결책을 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안타까움." (p. 202 ~ 203)


한 열 번쯤 새겨서 읽어야 할 대목이다. 저자가 ‘나’라고 표현한 사람은 사실 저자가 아니라 바로 ‘예외가 아닌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불편한가? 불편한 시대에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 살아갈 재간이 있다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박근혜가 유체이탈화법을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그런 화법과 태도에 익숙하지 않은지 먼저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나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의 99.9%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유체 이탈화법을 쓰고 있으며,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나 이외의 모든 것을 먼저 부정한다.


다음은 맞불 시민의 입장에서 인지부조화 이론을 전개해 보겠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시민을 크게 촛불에 찬성하는 시민과 촛불에 반대하는 시민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촛불에 찬성하는 시민을 다시 구촛불(처음부터 박근혜를 반대했던 시민)과 신촛불(국정농단으로 박근혜의 지지를 거둔 시민)로 나누었다. 즉 신촛불은 박근혜를 지지했던 반촛불에서 떨어져 나온 시민이다. 그리고 아직도 박근혜를 지지하며 인지부조화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시간의 실향민’들이 있다. 바로 반촛불, 맞불 시민이다. 맞불 시민은 신촛불과 달리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비뚤어진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① 정보 편식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지킴(TV조선 공격, 손석희 저주), 정보 편식의 목표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오로지 신념의 정당화.
② 사회적 지지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지킴 (사람 편식 : 지지를 주고받는 빈도의 증가, 전도활동 : 새로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설득하려는 시도 증가... 믿음의 동지들이 늘어나면 내 믿음도 안정)

그리고 저자는 맞불 시민(=어르신)의 고함과 구호 뒤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비명 섞인 메시지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정치 세대인 맞불 어르신은 다섯 가지 요인들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① 노인으로서의 고충, ② 사회적 고립, ③ 시간 고향에서 비롯한, 세대 대상을 중심으로 응집한 공통의 경험, ④ 세대 게임 플레이어들의 역할, ⑤ 시간 고향의 상실이 야기한 인지부조화. ①과 ②는 사회적 맥락, ③은 세대 형성의 필요조건, ④와 ⑤는 충분조건이다. 요컨데 정치 세대로서의 맞불 어르신들은 세대 게임 플레이어들의 도움과 탄핵이 야기한 인지부조화 때문에 세대로 결정되었다." (p. 215 ~ 216)


앞에서도 언급했듯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세대도 시간의 고향이 가지고 있는 사실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처참함에 노출될 때 세대 플레이어들의 먹잇감이 된다. “세대 정체성의 핵심은 시간 고향에서 취득한 경험과 기억이 아니라, 시간 고향을 향해 투사한 현재의 요구와 주장이다.” (p. 224) 현재 대한민국의 맞불 어르신은 다음과 같은 처참한 처지에 놓여 있고, 그 현실의 처참함이 깊숙이 잠자고 있던 케케묵은 시간의 고향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 OECD 최악의 노인 빈곤률, 최고의 노인 자살률, 최고의 실질은퇴연령
  •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전체 빈곤률이 노인 빈곤률 보다 높다. 
  • 한국은 노인일수록 더 가난, 전체 빈곤률의 3배 이상
  • 65세 이상 OECD 평균의 네 배 (한국 65세 이상 노인 상대 빈곤률 : 49.6%, OECD 평균 12.6, 2위 국가 24%)
  •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 10만 명당 81.9명, 미국의 5.6배, 일본의 4.7배, 70세 이상은 10만 명당 116.2명 다른 나라(5.8~42.3명)에 비해 최대 20배
  • 노인 고립률 : 100명 중 25명은 매우, 거의 고립된 삶
  • 사회적으로 격리된 어르신의 작은 세계는, 특히 정치적인 의견과 관련하여 의견이 한쪽으로 쏠리고 극단적이 되는 확증편향을 키울 우려가 크다. (p. 216~ “한국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것” 요약, 정리)


“MB의 추억”, “트루맛쇼”로 널리 알려진 김재환 감독은 2017년 개봉한 영화 “미스 프리지던트”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관찰했다.
 ① 박근혜의 지지자들을 부정하기보다 그들의 속내를 차근히 들여다 봄
 ② 1970년대라는 시간 고향과 신성한 삼위일체가 70년대 시간의 향우회원에게 각별한 의미를 제공함을 발견
 ③ 사실 여부를 따지고 토론하는 것이 특히 당사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파악


"관찰자와 당사자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산다. 이를 클리퍼드 기어츠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문화를 세 측면으로 나눈다. 인지, 감정, 도덕. 당사자는 3가지를 모두 포괄하지만, 관찰자는 인지적 측면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공감할 수 없다. 맞불 어르신의 입장에서 박근혜 탄핵은 세대 대상의 파괴이고 시간 고향의 점거다. 그들의 고통을 승화할 유일한 창구가 오만방자한 ‘젊은’ 놈들에게 철거당했다고 느낀다. “벗들아, 우리의 시간 고향이 파괴되고 있다.” (p. 237 ~ 238 각색 인용)


이대로 가다가는 서평을 쓰는 게 아니라 책을 통째로 베끼게 될 것 같다. 내 방식대로 마무리를 해 보겠다. 


맞불 어르신을 천박하고, 무식하다고 분리하여 비판하기 전에 나 또한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과 다르지 않은 태도(이를 테면 SNS 상에서의 사람 편식?)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다. 인류의 위대함은 완벽함이 아니라 미숙함 속에 숨겨져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인류는 영원히 미숙할 것이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가치와 당위가 마치 종교와 다르지 않은 신념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세대 게임의 1장의 제목, “의심하고 주저하기”는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확고’한 태도다. 이는 마치 인간이 절대 진리를 추구한 결과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절대가치를 발견한 것과 다르지 않다. 


Epilogue

사주나 관상, 또는 손금을 통계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주나 관상은 잘 모르겠지만, 손금은 나름 통계학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 유의미해 보인다. 사람이 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손금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뇌가 직립보행 이후 도구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고 가정한다면, 손금의 형태에 따른 통계는 사람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는 그야말로 통계일 뿐이다. 통계의 결과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데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통계가 예언의 도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통계의 결과일 수도 있는 사주나 관상, 그리고 손금을 통해 자신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으며, 그 결정된 미래를 알려고 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슷한 것이 또 있다. 만약 우리가 영화평론가에게 그 잘난 평론의 능력으로, 어떤 영화가 흥행할지 예언해 달라고 한다면? 영화의 흥행을 점 칠 수 있는 평론가라면 영화제작을 하지, 왜 평론을 하고 있겠는가!


사회학도 마찬가지다. 소위 미래학이라는 사회학의 전문 분야까지 등장했지만, 미래학에게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예측을 기대해선 안된다. 미래학을 포함하여 사회학의 쓸모는 갈수록 복잡해져 가는, 그래서 소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보다 냉철하게 진단하여, 사회 구성원이 미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계획하고 합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이 인류를 질병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고, 나아가 생명 연장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체의 비밀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질병에 대한 과학적 진단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배가 아프다고 배에 빨간약을 발라준다거나, 암에 걸린 환자를 오진하여 백혈병 처방을 하지 않으려면 우선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사회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대 게임」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그래서 해결할 수도 없다고 굳게 믿어 왔던 세대 문제를 진단한 책이다.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는 세대 플레이어는 지금도 세대 프레임이라는 가로등으로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세대 문제의 진실은 세대 프레임이라는 가로등과 멀리 떨어져 있는 칙칙하고, 냄새나고, 어두 컴컴한 곳에 방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학자, 그리고 세대학자 전상진은 우리에게 어두운 곳에 방치되어 있는 세대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세대 게임」이라는 손전등을 주었다. 글의 처음에도 밝혔듯이 난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서평을 다 쓰고 나니 지극히 자기만족을 위한 서평을 쓴 것 같은 느낌이다. 누가 이 지루하고 조잡한 글을 끝까지 읽고 내가 「세대 게임」을 읽고 느낀 강박에 동의해 주겠는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가 남긴 명대사가 있다. 

“너나 잘하세요.” 

그래, 부족하디 부족한 내가 감히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겠는가! 그저 나 하나 잘하기 위해 노력할 뿐...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