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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시대 진단

풍등과 쓰레기,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

by Back2Analog 2018. 10. 13.

경찰은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의 원인으로 풍등을, 그리고 풍등을 띄운 스리랑카 노동자를 범인으로 지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매우 익숙한 패턴이다. 문제를 빨리 해결... 아니 덮기 위해 가장 만만한 대상을 찾아 책임 전가하기...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언론은 발빠르게 비정규직 선장에게 그 어마어마한 책임을 전가했다.
차라리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게 더 낫다. 소는 이미 잃었고, 외양간까지 고치면 지나친 비용이 들기 때문일까? 부실의 책임을 힘 없는 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가 왜 문제의 해결보다 책임의 전가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논리적 비약과 괴변을 동원해 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복잡한 우연과 간편한 필연...
외양간이 부실하다고 반드시 소를 잃지는 않는다. 외양간이 부실해지자마자 소를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를 잃은 건 외양간이 부실하다는 필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필 그날 재수 없게 소가 부실한 외양간을 넘은 우연의 결과이다. 건조한지 20년이 넘어 수명이 간당간당한 상태에서 과적을 한 세월호가 하필 그날 침몰하거나, 바람에 떠밀려 온 풍등이 하필 고양 저유소 근처 잔디밭에 불씨를 안은 채 떨어져 대형화재로 이어지거나... 모두 인간이 의도로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영역에서 발생한 사고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변수를 가진 우연에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을 쉽게 전가할 수 있는 간편한 필연을 찾는다. 외양간을 부실하게 방치한 종놈, 그날 세월호를 운행한 비정규직 선장,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는 모두 책임을 전가하기 간편한 필연들이다.

2. 책임을 둘러싼 회피의 카르텔
어쩌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책임은 간편한 필연이 아니라 복잡한 우연에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우연의 책임 안에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 구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책임을 내가, 그리고 우리가 져서는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은 나와, 나를 포함한 개인과 개인의 우연적 결합체로서의 집단인 우리와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 안에 우연히 포함되어 있었던 한 개인은 책임질 일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라는 집단에서 분리되어 필연이라는 개인이 된다. 그게 편하다. 그래야 나와 우리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임을 둘러싼 회피의 카르텔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곳곳에 형성된다. 책임을 ‘회피’해야 ‘해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놈의 아재 근성... ㅠㅠ)

3. 손해는 죄악이라는 자본주의의 논리
자본주의에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 비용이다. 수익이 비용보다 높으면 이익을, 낮으면 손해를 본다. 이익을 얻기 위해 투자한 비용은 선한 비용이다. 하지만 손해를 발생시킨 비용은 악한 비용이다. 이익에는 보상이, 손해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익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과 손해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양대 축이다. 그게 무너지면 자본주의도 무너진다. 이익에 따른 보상이 없다면 누가 경쟁적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는가? 손해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누가 긴장을 유지한 채 노동에 임하겠는가?
일찌기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마태복음 19:23~24). 적어도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근검절약하여 부를 축적하는 행위가 프로테스탄트의 미덕이 되었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토대를 지키는 단단한 상부구조가 되었다. 점차 이익 = 선, 손해 = 악이라는 등식이 문화적으로 확산되면서 가난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죄가 되었다. 그리고 가난과 함께 손해라는 악을 행한 필연적 대상에게 우리는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제목에 충실하기 위해 화제를 전환한다. 고양시의 저유지 화재 사고가 비겁하게 국가가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라면 최근, 그리고 미래의 골칫거리로 부상하고 있는 쓰레기 문제는 개인이 집단에 책임을 전가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소액의 비용만 내면 눈 앞에서 사라지는 쓰레기로 인해 우리는 일다우일다(日多又日多) 더 많은 쓰레기를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마구마구 섞어서 버린다. 이대로 가다간 물건을 사는 것보다 쓰레기를 버리는 데 더 많은 비용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중국발 미세먼지를 피할 수 없듯, 우리가 지나치게 소비에 익숙해질수록 더 많은 쓰레기가 점점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행복과 건강을 헤칠 것이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행정이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은 개인이다. 세금을 냈으니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달라는 단순한 요구가 언제까지 먹힐지... 쓰레기 문제는 더이상 행정에 일방적으로 전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주거 밀집지역이라는 이유로 폐기물 처리시설을 짓지 말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더이상 설득력이 없는 이유다. 폐기물 처리시설은 역설적으로 가장 폐기물을 많이 배출하는 주거 밀집지역에 설치해야 한다. 그래야 장차 쓰레기로부터 인류의 행복을, 그리고 건강을 지켜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고양시 저유소 화재의 필연적 책임을 뒤집어 쓴 스리랑카 노동자를 보며 최근 종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일본군 대좌의 말이 오버랩된다. 

“우월한 민족은 항상 열등한 민족을 실망시키지... 미국은 필리핀을, 영국은 인도를,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혹시 대한민국 경찰은 스리랑카를 우리보다 열등한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풍등을 띄운 사람이 미국인이었어도 그 책임을 물었을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국에게는 열등한 국가인 것 같다. 강경화 장관의 5・24조치 해제 발언과 관련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국가,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They won't do it without our approval"이라고 말했다. approval... 우리는 열등한 국가를 넘어 미국의 '승인' 없이는 같은 민족끼리 오해도 풀 수 없는 식민지인가?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