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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미디어 비평

뒤늦은, 그리고 엉뚱한 "알리타, 배틀엔젤" 감상기

by Back2Analog 2019. 2. 24.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제작자 제임스 카메룬이 "알리타, 배틀엔젤"로 돌아왔다. 사실 난 제임스 카메룬보다 그 원작인 "총몽"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봤다. 총몽은 하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배틀엔젤을 보고 다시 원작을 보고 싶어 수소문을 했으나, 출판사에선 절판, 중고나라에선 알리타의 인기를 타고 1부, 2부와 외전 전집이 35만원이라는 거액에 거래되고 있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총몽은 1부 9권이 나왔고, 그 후에 2부, 라스트 오더 19권, 3부 화성전기는 2014년부터 연재해 현재 6권까지 발매되었다고 한다. 내가 본 건 1부... 9권을 다 봤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총몽 외전은 2011년에 한국에서도 정식 발간되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절판... ㅠㅠ  출판사에서 가지고 있는 재고를 가지고 중고 장사를 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재발간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총몽 1부는 유투브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볼 수 있다.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시라. 

비교적 알리타는 원작인 총몽의 내용을 충실히 따랐다. 단 주인공 이름인 "알리타"의 원작 이름은 "갈리"다. 원작의 어감이 좀 거시기 하긴 하다. 

알리타와 총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웹상에 차고도 넘치니 굳이 부연하지 않겠다. 26세기 미래를 그린 알리타, 그 중에서도 공중도시 "자렘"을 보며 난 21세기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자렘을 떠올렸다. 탐욕스럽게 하늘로 치솟아 있는 고층의 아파트단지, 뉴타운이야말로 21세기에 존재하고 있는 자렘이 아닐까? 

<쓰레기를 배설(?)하고 있는 공중도시 자렘>

<무려 2013년 7월에 페북에 올린 글이다...>

아파트는 생산이 아닌 집단화된 소비의 공동체다. 공동체라는 말을 아파트에 붙이는 것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소비하거나, 요구할 때 아파트의 공동체성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나도 인천의 한 싸구려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지만... 아파트 단지와 마을공동체는 마치 경제의 수요, 공급 곡선처럼 반대로 어긋나 있는 듯 하다. 아파트단지가 늘어날수록, 소규모의 생산과 소비가 생태계를 이루는 마을공동체는 사라지게 된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 정도 되는 소비집단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자는 대기업 밖에는 없다. 아파트 단지에서 소비하고 남은 찌거기는 단지 밖으로 버려진다. 아파트 단지 밖에는 아직 아파트가 되지 못한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버려지는 찌꺼기는 처음엔 단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점점 그 찌꺼기들이 어쩔수없이 아파트 단지에 가까워지게 되면, 그 기나긴 과정 속에서 발달하게 된 과학 기술력과 자본력으로 아파트 단지는 언젠가 지상을 버리고 공중으로 부상할지도 모른다. 마치 알리타에 등장하는 26세기 공중도시 자렘처럼...

<유고(휴고?)의 대사가 퍽 역설적이다...>

아파트가 장차 자렘처럼 공중부양할 가능성에 대해 조금 부연을 해 보겠다. 과거 자본주의는 맑스가 예견한 과잉생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현재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토를 개척해 그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 시기를 소위 제국주의 시대라 일컫는다. 식민지 개척과정에서 자본주의는 금융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용감한 모험이나 지적인 욕망을 해결하려고 했던 탐험의 결과가 아니다. 식민지로 향하는 새로운 항로가 필요했던 스페인 여왕이 미래 가치를 위해 자금을 끌어 모아 콜럼버스에게 소위 배팅을 한 결과이다. 식민지를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효율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터득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평화롭게 식민지에서 철수한다. 현재 제국주의의 뒤를 이은 금융 자본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영토가 아니라 상상 속에 존재하는 미래의 가치를 현실화시켜 그 모순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천하의 금융 자본주의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은 금융 자본주의가 만든 역설이다. 파생 금융상품을 쪼개듯이 미래의 가치를 이리, 저리 쪼개다 보니 미래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위대하다. 자본주의는 인간보다 더 위대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든 청출어람이다. 아마도 위대한 자본은 과거 세계 대공황과 사회주의의 위협을 극복했었던 것처럼, 또다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영토의 확장을 통해 모순을 해결했던 제국주의의 경험과, 미래 가치를 현실화시키는 금융 자본주의의 경험, 그리고 빛나는 인류의 과학기술을 결합시켜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공중도시 자렘이다.

맑스는 1818년이 아니라 차라리 지금 태어났어야 했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