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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책 이야기

미발간 소설 “두번째 사랑”에 대한 섣부른 비평…

by Back2Analog 2017. 11. 16.


얼마전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선배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서로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얼추 비슷한 시기, 비슷한 태도로 대학생활을 했다는 공감대로 인해 쉽게 마음을 연 그런 선배였다. 

그 선배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있었다고 했고, 곧 출간을 앞두고 있으니 한 번 읽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어떤 소설이냐고 물으니 그 선배는 이내 “장편통속연애소설”이라고 정의를 내려주었다. 

장편… 통속… 연애… 소설?

한가하게 소설이나 읽을 여유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보내달라고 했다.

소설을 쓰다보니 애초에 의도했던 것보다 길어져 4권으로 늘어났고, 출판을 위해 그 중 두 권을 앉혔으니 두 권을 먼저 보내주겠다고 했다.

소위 출판인끼리 통하는 ‘앉혔다’는 의미는 출판 전문 프로그램으로 편집을 마쳤다는 의미이다.


한 권이 먼저 카톡으로 왔다.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보통 소설을 읽을 땐 맨 처음이 가장 힘들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그 만남은 내가 선택한 만남일 수도 있고, 지인의 소개로 시작된 만남일 수도 있다.

이번 경우는… 호기심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저 인간이 과연 어떤 소설을 썼을까 하는…


처음엔 긴장을 하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어색한 표현과 심지어 오타도 몇 개 잡힌다… ‘그렇지, 그 인간이…’

완벽한 상대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하지만, 지극히 인간다운 어설픔 몇 자락은 나의 경계심을 흩뜨려 놓는다.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그 선배의 인생, 그 내면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대학 새내기 때인 1988년이다.

‘응답하라 1988’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단면 중 ‘골목’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지금은 사라진 골목…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응팔을 보며 그 ‘골목’을 추억했다.

그 당시 난 그 골목에 있지 않았고, 주로 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응팔을 보고 추억할 수 있는 접점이 많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 이야기의 배경이 내가 살았던 쌍문동 103-144번지, 바로 옆 골목이었음에도 말이다. 


1988년,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대학이다. 주인공은 85학번에 총학에서 일하고 있는 운동권… 선배이다.

슬슬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글자를 세면서 읽기 시작한 소설이 이제는 문장을 하나씩 건너 뛰면서 읽고 있다.

내가 대학교 새내기 때 겪었던 많은 사건들이 비교적 나와 다르지 않은 시선과 문제의식으로 펼쳐진다.

얼마전 노래패 후배들로 인해 만났던 22년 전 내 모습으로 인해 가뜩이나 마음이 싱숭한데, 

이제는 한 선배의 자서전인지도 모를 경험담이 서늘한 바람이 되어 내 마음을 더욱 생숭하게 만든다…


거기에 연애 이야기가 조금씩 덧입혀지기 시작한다.

‘그래 나도 그 당시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지… 아니, 많았지… ㅎㅎ’


혹시라도 이 소설이 출간되면 사서 읽을 독자들을 생각해 더 이상의 스포는 자제한다.

대신… 아직 마지막 4권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비평을 하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은 횡적이다. 그 횡적인 시간의 흐림 위에 인간의 수직적 경험이 더해져 시대를 이룬다.

횡적인 시간을 공유했기에 한 시대를 산 사람들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무관하게 직립보행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역사와 경험까지 완벽하게 공유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공감과 공유의 차이… 그 수직적 경험들은 때때로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며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공간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간의 끈들이 조금 더 촘촘해 진 것 뿐이다.


작가가 주장했던 바, ‘장편통속연예소설’의 주제인 연애가 주제로 떠오르면서 주인공은 내가 지레짐작으로 걸쳐놓은 공감의 끈들을 하나씩 끊어 나갔다. 그 끈들이 모두 끊어졌다면 난 중간에 소설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다소 막장(?)으로 전개되면서 이제는 작가가 아닌 내가 그 공감의 끈을 끊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처음에 지레 걸쳐놓은 공감의 끈들이 모두 끊어졌다고 생각할 즈음, 내 다른 손은 나도 모르게 작가가 무심하게 던저 놓은 다른 공감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노련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책 읽기를 멀리했던 내가 그렇게 소위 공감의 끈들을 끊어내고, 붙잡고를 반복하며 3권을 몰아쳐 읽었으니 말이다. 

소설을 읽던 중, 저자와 개인적인 소통을 시도했을 때 저자는, 자신이 독자들에게 어떤 끈을 던져 놓은 것은 맞지만, 그 끈을 붙잡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붙잡고, 말고는 독자들의 몫이다… 라는 다소 시니컬한 답변을 받았다.  


난 저자가 책을 읽은 독자들로부터 대략 두 가지 관점으로 비판적 문제제기를, 그것도 매우 강하게 받을 것이라 추측한다.

첫째, 난 처음에 이 소설의 정체성이 ‘장편통속연애소설’이 아니라 ‘장편운동권연애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소설의 전개는 그런 나의 공감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주장하는 보편적 도덕성의 가이드라인인 ‘불륜’이 등장하면서 난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시대의 진보는 횡적 시대의 끈으로 모든 주관적 수직성을 무시하거나 폄하해 온 관성이 있다. 나 또한 그러한 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소설을 읽는 도중 저자에게 “형, 참 나쁜 놈이네~”라는 카톡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 모던 사회는 나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해 온 수많은 수직성에 대해 더이상 가타부타 참견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아니마는 ‘공감(共感)’입니다. 나의 학생운동의 출발은 문제 해결에 대한 어떤 추구가 아니라 단지 공감으로 함께하고자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나는 민중이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도, 독재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이 나서는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들의 고민과 주장, 그로 인해 그들이 받는 고통에 공감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조국의 통일과 민중이 주인 되는 위대한 나라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나는 단지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웃들의 옆에 가만히 서 있고자 했을 뿐입니다. 

나의 의식화는 고3 시절, 교육 문제에 대한 출판과 관련하여 임신한 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갑자기 끌려간 누나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절대로 전위가 아니고 리더도 될 수 없었으며 사실 그냥 ‘따라쟁이’였어요.

우리나라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투쟁의 방법이나 노선은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으며 서로 입장과 행동을 달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참 많이도 서로 간에 갈등과 분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학 시절 남학생들이 그런 과정에서 어떤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설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반대로 오히려 소수이며 마치 운동의 한 구석에 내몰린듯한 여학생들이 공감의 깊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녀들과 가끔 취중에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때 나는 내 내면의 아니마를 묵묵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다소 눈물이 많은 남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나는 남자였기 때문에 좀 더 바리케이드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조금 더 멀리 돌을 던져야 했습니다.

당신이 나의 아니마를 파고 들어왔듯이 반대로 보면 그 시절 당신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쳐놓은 나의 그물에 걸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보통보다 조금 더 깊고 부드럽게 관용과 공감의 가면을 쓰고 있는 박민수라는 깊은 늪 속으로 당신은 빨려들어 왔습니다. 

- 두 번째 사랑 3권 제5부 중에서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이 소설에서 소위 80년 대 운동권이 가지고 있었던,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아니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도덕성과 순수성을 기대한다면 그 독자는 나처럼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야이 미친 놈아, 왜 때려!"


둘째, 이 소설은 대학시절 운동을 하다 만난 첫사랑과 결혼한 남자 주인공이 두 번째 사랑을 만나 소위 양다리를 걸치게 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을 지극히 남성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최근 가장 민감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주의 비판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여성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난 유발 하라리가 밝혀내지 못한 가부장제의 근거에 대해 다양한 추론을 해 보고 있는 중이다. 


흔한 고정관념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보다 남을 조종하고 유화책을 쓰는 능력이 우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이런 고정관념에 진실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여자들은 뛰어난 정치가나 제국 건설자가 되었어야 한다. 전장에서의 더러운 일은 테스토스테론이 가득 찬 단순한 마초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대중적인 신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확실하지 않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에서


하여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 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관계를 선택했듯, 여성들은 물리력을 앞세운 마초같은 남성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단지 관계를 맺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을 가능성…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발전의 정도가 여성들의 입장에선 가부장제가 생존이라는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허용 가능의 범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늘 무언가 공통으로 해결해야 할 절박한 목표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양보해 왔다. 내가 먹고 사는 게 바쁘면 대통령에게 모든 통치의 권한을 위임하지만, 그 권한의 위임이 몰고온 집단적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 인간은 개인적인 일을 뒤로 하고 광장으로 뛰쳐나와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 또한 다르지 않다. 농업혁명은 인류에게 정착이라는 달콤한 선물을 주었지만, 동시에 급격하게 늘어난 개체수로 인해 생존에 필요한 생산력 확대라는 숙제도 안겼다. 어쩌면 계급사회로의 이행은 생산력 확대라는 절박한 목표 앞에 인류가 지배와 피지배라는 불평등 구조를 허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여 지금까지 인류는 더 우월한 사람의 지배가 생산력 확대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 지배를 허용했다. (마치 인과관계처럼 표현했지만, 이는 동시에 의도와, 의도와 무관하게 전개된 역설적 결과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맑스의 예견처럼 자본주의에 이르러 인류의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어 이제는 굳이 생산력의 확대에 몰두하지 않더라도 분배만 잘 이루어진다면 인류의 생존을 위한 더이상의 생산력 확대를 필요로하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허용했던 수없이 많은 관성들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계급과 가부장제 아닐까?

부르주아 혁명을 바탕으로 성장한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동물적 욕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고, 맑스의 이론에서부터 출발한 계급 투쟁의 역사 속에서 단련된 여성들은 이제 길고 긴 억압의 터널인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다. 

난 소설을 읽으며 그러한 여성주의적 주장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아직은(?) 인정할 수 없는 과도함에 대한 남성 입장의 반론? 변론? 변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체로 이런 문제에서 노련한 쪽은 여자들입니다. 남자들은 말이에요. 대부분 서툴다고 봐야 합니다. 여자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염려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만날 때나 헤어지고 난 다음에도 내가 과연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였나? 당신들은 자신의 섹스어필을 염려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마주 보면서도 가끔 그녀의 벗은 몸을 상상하지만, 여자는 옷을 벗는 순간에도 어떻게 보일까를 걱정한다지요.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본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겠지요. 그것 때문에 당신들은 졸려 죽겠는데도 화장을 지우고 세안을 하고 오버 나이트 크림을 다시 바르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얼굴을 그리고 하는 그런 귀찮고 소모적인 행동을 반복합니다. 

<중략>

자연으로 볼 때 인간의 아이들은 사실상 모두 일종의 미숙아들입니다. 몇 년이 가도 기본적인 먹고 싸고 조차가 안 되는 인간의 아이들은 엄마의 시간과 엄마의 젊음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10년이 가도 성징(性徵)이 완성되지 않고, 20년이 가도 성장(成長)이 멈추지 않는 이 인간의 자식은 우리 종이 만든 최대의 괴물이며 실패작입니다.

- 두 번째 사랑 3권 제5부 중에서


소설 속에는 주인공은 이렇게 여러 차례 여자에 대해 주관적 해석과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해석과 주장이 저자의 것인지, 아니면 그저 픽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개연성을 위한 장치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어찌되었든 저자는 창작이라고 하는 숭고한 작업의 뒤에서라도 수없이 많은 남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섣부른 비평에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에 감정이입되어 마치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족들을 평소처럼 대하지 못하였다. 감정이입을 당했는지, 내가 자발적으로 감정을 이입했는지는 솔직히 나도 정확히 분리해 낼 수 없다. 위에 페미니스트들로부터의 비판을 걱정했지만,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비자발적으로 존재하게 된 모든 것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까지 나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내 탓은 아니지 않는가… 맑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관계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대상을 나와 분리하여 배척하는 것은 슬기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운동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는 과거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화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작가는 남성들의 심리(수면 아래 깊숙히 감추어져 있는 욕망까지도…)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내가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심리도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으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한 것 같다. 

어쨌든 곧 이 소설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들에게 던져질 것이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읽고, 그 책을 통해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이 비폭력적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