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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미디어 비평

"슬기로운 깜방생활"에서 배우는 지혜...

by Back2Analog 2018. 2. 24.

    '응답하라' 시리즈로 유명세를 탄 신원호 PD의 최근작 '슬기로운 깜빵생활'...
    1회, 6% 즈음에서 시작된 시청률이 최종화인 16회에는 지상파 드라마를 훌쩍 넘어 최고 시청률 13.2%를 찍었다. 난 거의 종영을 앞두고 옆지기가 보고 있는 재방송을 어깨 너머로 보기 시작했는데, 드라마에서 펼쳐지는 죄수들의 다양한 사연이 하도 궁금해 옆지기에게 물어보다 지쳐 '넷플렉스'를 통해 1회부터 정주행을 하고 있다. 드라마에 빠져 있는 옆지기에게 드라마 내용을 물어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대한민국의 남편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궁금하면 옆지기에게 묻지 말고, 인터넷을 뒤지든, 나처럼 다시보기를 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다.

    인터넷에 보면 '슬기로운 깜빵생활'의 성공 요인에 대해 다양한 논평들이 나온다. 일반적이지 않은 교도소를 드라마의 소재로 삼은 점, 대학로 출신 연극 배우를 대거 등장시킨 신선한 캐스팅에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확인된 신원호 PD의 탁월한 연출력까지... 난 기존의 평론에 '슬기로운 깜빵생활'의 성공 요인에 대해 약간의 주관적 관점과 양념을 더하고자 한다. 

    먼저, 10화에서 나왔던 에피스드 하나를 소개한다.

(박스에서 양말을 찾는 유대위)
# 유대위 : (카이스트에게) 제 양말 못 보셨습니까?
# 카이스트 : (유대위에게 맨 발을 보여주며) 나 양말 안 신어.
(문이 드르륵 열리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한양, 흰양말을 신고 있다.)
# 유대위 : 그거 제 양말 아닙니까?
# 한양 : 아, 그래? 몰랐어. 그냥 널려 있길래 신었는데...
# 유대위 : 왜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십니까?
# 한양 : 몰랐다니까~ 아유, 잔소리 잔소리... 그 양말 좀 같이 신으면 안돼? 그럼, 너도 내 양말 신어.
# 유대위 : 싫습니다.
# 한양 : 그래, 신지 마. 싫으면 너만 손해지, 싫으면 시집 가~
# 유대위 : 차암, 버릇 없네요.
# 한양 : 응, 그런 얘기 왕왕 들어. 그런 너는 참 융통성 없네요. 너도 그런 얘기 왕왕 듣지? 애가 아주 그냥 꽉 막혔어, 꽉!
# 유대위 : 그런 말 처음 듣습니다.
# 한양 : 당연히 그랬겠지. 너 밑에 애들이 네 앞에서 그런 얘기 하겠냐? 어유, 네 밑에 애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여튼 꽉 막힌 상관 밑에서 일하는 게 제일 힘들어.
# 유대위 : 듣자 하니 강남의 소문난 부잣집 도련님이라던데... 너 지금 하는 짓들은 네 응석 오냐오냐 받아 주는 너네 부모님 앞에서나 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 조용히 부모님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나 쓰면서 살 것이지, 남에게 피해는 왜 줘! 안 그래? 도련님?
(한양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진다.)
# 한양 : (정색을 하며)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조용히 해!
# 유대위 : 네가 먼저 지껄이지 않았습니까~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장면 바뀌며 장기수와 김제혁의 대화)
# 장기수 : 한양이 자도 성깔있다, 야. 순둥순동한 줄 알았더만...
# 김제혁 : 화 내도 저게 다에요. 애가 천성이 착해요.
# 장기수 : 마, 착한 놈이 교도소에 와 있노? 응? 요, 요, 요 봐라, 응? 요 어데 착한 놈이 있드노? 내도 살인자 니도 살인자. 그, 지 유대위도 살인자...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양은 마약쟁이다. 늘 눈동자가 풀려 있고, 말은 어눌하고 짧다. 반면, 유대위는 사병을 폭행해 살인에 이르게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왔다. 시청자들에게 한양과 유대위는 범죄자와 누명을 쓴 억울한 사람이라는 선악 구도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 한양은 유대위를 융통성이 없는 군바리라고 공격을 한다. 참다 못한 유대위는 한양을 부모를 잘 만난 강남의 망나니 금수저라고 공격을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풀려있던 한양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다. 난 마약 후유증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인 한양의 정색한 표정에서 적지않은 무게감을 느꼈다.

    한양과 유대위의 공격 포인트를 살펴보자. 먼저 1회전... 한양은 유대위의 '융통성 없음'을, 유대위는 한양의 '버릇 없음'을 공격한다. 여기까지는 서로 참을 수 있다. 왜? 한양의 입장에서는 버릇 없는 것이 융통성이 없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유대위는 직업 군인으로서 융통성이 없다는 말은 원칙을 잘 지킨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양과 유대위는 서로 두 번째 공격에서 감정적으로 폭주한다. 한양은 유대위의 융통성 없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유, 네 밑에 애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여튼 꽉 막힌 상관 밑에서 일하는 게 제일 힘들어." 참고 있던 유대위도 한양의 버릇 없음이 끼치는 피해를 언급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 조용히 부모님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나 쓰면서 살 것이지, 남에게 피해는 왜 줘! 안 그래? 도련님?"

    관전자인 시청자의 입장에서 난 남들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한양의 버릇 없음과 유대위의 융통성 없음은 그닥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범죄자인 한양과 누명을 쓴 유대위라는 설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한양과 유대위는 상대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 성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면 그건 단순하게 다르다는 것으로 인정하거나 인정받을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내가 '슬기로운 깜빵생활'의 주옥같은 에피소드 중에서 특히 이 장면에 주목한 이유는... 우리는 흔히 '취향'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전이시키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좋다'와 '싫다'는 철저히 취향의 문제이다. 군인으로서 원칙이 중요한 유대위에게 한양의 '버릇 없음'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가치의 문제이다. 반면, 버릇이라는 것에 대해 그닥 중요하게 생각해 오지 않았던 한양의 입장에서 유대위의 융통성 없음은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나쁜 성격이다. 사실 난 둘의 논쟁을 보며 처음엔 유대위의 편을 들었다. 한양이 마약쟁이여서, 그리고 유대위가 억울한 누명을 써서가 아니라 유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버릇 없음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약에 취한 한양의 정색한 표정을 보며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과 가치는 분리되어야 한다. 나한테 좋은 것이 반드시 남한테도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권력을 가진 자의 취향은 그 권력이 미치는 대상에게 가치로 작동하는 불편한 현실을 자주 목도한다. 대통령의 취향이 국민에게, 상사의 취향이 부하직원에게, 부모의 취향이 자녀에게 마치 가치가 되어 폭력적으로 작동하기도 하지 않는가! 

    내가 '슬기로운 깜빵생활'을 보며 얻었던 슬기로운 지혜 중 하나는 상대적일 수 있는 '취향'을 옳고, 그르다는 가치와 결부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이다. 아마 근대를 지나며 권력이 배제된 취향까지는 그나마 보편적으 로 인정하게 된 것 같다. 나아가... 난 취향을 넘어 신념이나 가치도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족하디 부족한 인간이 현재 믿고 있는 신념과 가치가 마치 신의 정해준 것처럼 완벽하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변화와 발전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취향을 넘어선 가치와 신념의 상대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