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짜뉴스가 창궐하는가? (2. 가짜뉴스의 원인)

1. 가짜뉴스의 정의 (링크 클릭)

2. 가짜뉴스가 창궐하게 된 원인은?

가짜뉴스가 창궐하게 된 현상적인 원인을 모두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여 나는 가짜뉴스가 이 시대에 창궐하게 된 본질적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상진은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의 원인을 사회적 고통에서 찾았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 고통이 없었던 시절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고통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한다. 공포영화를 볼 때 무서운 장면이 어디서 어떤 형태로 나올지 안다면 그 공포감이 반감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세 이전까지는 그 고통에 대한 설명을 신정론이 담당했다. 신정론은 왜 전지전능한 신이 이 따위 세상을 만들었는지를 설명한다. 아직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익숙한 논리가 있다. 행운은 신의 은총이고, 불운은 신의 시험이라는…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서며 신의 영향력이 부쩍 약해졌다. 그래서 근대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음모론이라는 것이다. 

가짜뉴스 또한 본질적으로는 음모론과 다르지 않은 쓸모를 가지고 있다. 음모론이 불평등한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존재했다면, 가짜뉴스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평등의 해소가 불가능한 양극화 시대의 진통제 역할을 담당한다. 음모론이 신정론을 대체한 것처럼, 이제 가짜뉴스가 음모론을 대체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가짜뉴스가 창궐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자. 

첫째, 정보 권력의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음모론의 시대와는 다르게  특별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누구나 모바일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나아가 개인 미디어와 SNS의 발달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개인이 편하게 자신의 이해관계와 취향을 탑재해 정보를 생산해 내고, 유통한다. 둘 이상이 모여 작당할 필요도, 비밀스럽게 계획을 짤 필요도 없다.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모바일 디바이스 하나면 간편하게 가짜뉴스를 생산해 낼 수 있다. 바야흐로 21세기 개인은 그 어떤 집단에도 대항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정보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둘째, 인간의 관계 기준이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바뀌었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관계의 단절, 혹는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사회라는 말 또한 한계에 봉착했다고 지적한다. 개인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은 관계의 단절이 아닌 ‘짐이 되고 있는 관계’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엄기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곁을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곁은 파괴되고 편으로 몰아가는 사회, 특히 2013년 초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뒤 정치인의 말에서부터 댓글에 이르기까지 심심찮게 눈에 띄었던 것이 ‘어느 나라 정치인(또는 국민)이냐’는 물음이다. 이렇게 ‘편’을 강요하는 언어에는 반성이나 성찰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편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지지 혹은 적대’의 세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지하는 쪽은 무조건 옳고 반대편은 무엇을 하더라도 틀리게 된다(엄기호. 2014. 단속사회).”

얼마 전 손호철 교수는 한국일보 칼럼을 통해 대한민국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내 편이냐, 아니냐”는 정파만 남은 “반지성의 사회”라고 일갈한 바 있다. 사실 이러한 편 가르기와 편 먹기는 인류의 일상이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관계의 끈끈함을 확인한다. 뒷담화를 통해 언어가 발달해 온 이치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와 친밀해지려면 친밀해지려는 대상과 함께 누군가를 디스해야 한다. 문제는 편 먹기의 기준이다. 한때 대한민국은 지역감정이라는 기준으로 편을 먹었다. 가짜뉴스는? 개인의 이익이 그 기준이다.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면 지역을 넘고, 신념을 넘고, 심지어 국경까지 넘는다. 우리가 미국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트럼프의 정치적 생명을 걱정하는 이유는 트럼프가 남북문제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제3세계 어느 국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걱정했다면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생산하는 가짜뉴스의 기준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그 기준이었다면 굳이 가짜일 이유도 없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역감정’의 시대를 보내고 ‘이익감정’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셋째, 개인의 약진이다. 과거에는 집단이 개인을 압도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은 때때로 원하지도 않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영화 ‘판도라’에 보면 군 통수권자이자 행정의 수반인 대통령조차도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을 막기 위해 군인이나 소방대원의 투입을 명령하지 못한다. 지금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에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지라고 명령할 수 없는 시대다. 과거에 집단이 개인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단에 의지하지 않고는 개인의 생존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농경사회를 떠올려 보라.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에서는 굳이 집단에 의지하지 않아도 생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아니, 집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오히려 번거로울 뿐이다. 

개인의 합인 집단이 한때는 ‘집단 지성’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집단의 지성이 개인의 이익에 반한다면? 개인의 하부단위가 되어버린 집단은 개인의 이익을 지켜줄 때만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은 개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학연, 지연, 혈연, 심지어 근대를 통해 단단한게 구조화되었던 국가의 울타리 마저도 해체되고 있으니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대략 난감할 뿐이다.

to be continued...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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