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에 대한 너의 입장을 밝혀라!” 영화 “기생충”을 보고…

최대한 스뽀를 자제하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불편하신 분은 영화부터 보시길… ^^

귀족과 노예라는 제도적 계급이 해체되고, 자본(자산?) 유무가 갈라놓은 공고한 문화적 계급이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많은 영화 평론가들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이 그러하듯 기생충 또한 자본주의 시대의 계급을 다룬 영화라고 말한다. 소위 학자들이고린내나는 천박한 계급을 가능한 멀리 떨어져서 우아하게 조망한다면, 봉준호 감독은 영화라는 돋보기를 들고 마치 탐정처럼 계급이 만들어 처절한 현장을 누빈다. 

영화 기생충에는 계급 사회를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입장들이 등장한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계급에 대한 입장을 알아보기 전에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이 말했던난세 대한 견해를 먼저 살펴보자.

난세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난세의 희생자, 난세와 싸우는 자, 그리고 너(이방원)처럼 난세를 타는 자. 난세의 칼이라? 아니, 그것은 단지 네 마음속에서 자라난 벌레일 뿐이다. 정치를 하려는 자는 누구나 마음속에 벌레 한 마리를 키운다. 너에겐 지금은 난세라며, 난세엔 살아남아야 한다며 어쩔 수 없다며 달콤하게 속삭였겠지. 허나, 그 벌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벌레의 말을 따르다 보면 결국 네 놈이 벌레가 되는 것이다. 난세를 타는 자들이 난세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것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중)

난세를 바라보는 입장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난세를 타는 . 난세를 타는 자들은 사실 난세인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의 비겁하거나 부도덕한 행위에 어쩔 없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현실은 반드시 난세여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마음속에 '벌레'를 한 마리씩 키우고 살 뿐이. 그렇다면 계급을 대하는 입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지금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라면 지배와 피지배계급의 입장으로 단순하게 분류할 있을 것이다. 피지배계급의 입장에 서는 것이 바로 맑스가 주장하는 노동자의 당파성이다. 지배계급인 자본가가 계급사회의 가해자라면,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는 계급사회의 피해자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계급사회의 피해자들에게 단결을 통해 계급사회의 가해자인 자본가들에게,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 구조 자체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저항하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과잉생산이라는 모순을 안고 태어난 자본주의는 모순의 과정, 제국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통해 물질 문명을 한껏 성장시키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없을 정도로 복잡한 사회를 건설했다. 

네이버 웹툰 "약한 영웅" 중... 소위 일진 계급에 저항하는 주인공 연시은이 등장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했던가? 디테일로 가득찬 세상에서 누가 악마고, 누가 천사인지 누가 감히 구분할 있단 말인가! 피해자는 있되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누가 자본주의의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중에 예전처럼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지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억압하는 본질이 계급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있지만, 현재 자본주의가 여전히 지배와 피지배계급으로 단순하게 이분화되어 있다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난세에 난세를 타는 자가 있듯, 계급 사회에는 계급의 경계를 오가며 기생하는 벌레, 기생충들이 존재한다. 아니,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를 제외하면,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 속에서 비겁하게 살아가고 있는 기생충들일지 모른다. 영화기생충 아마도, ‘어쩔 없이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서 가해도, 저항도 없는 같은 기생충을 다룬 하다. 내가 바로 기생충이다 보니 기생충의 입장에서 영화를 수밖에 없었다. 함안댁(미스터 션샤인에서의 배역... ㅎㅎ)이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에서 가슴이 철렁했고, 이선균 가족이 캠핑을 포기하고 돌아오고 있다고 전화를 했을 , 나의 공포심은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갑자기 의문이 든다. 소위 금수저들은 기생충을 어떤 입장에서 보았을? 혹시라도 송강호 가족의 사기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생각에 내가 공포심의 정점을 찍었던 장면에서 오히려 통쾌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사람의 뇌에는거울 신경세포(mirror neurons)’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손을 베었을 , 보고 있는 사람도 같은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심리학 용어로 이렇게 상대의 감정을 거울처럼 반영해 느끼는 것을 소위 미러링(mirroring)이라고 한다. 미러링은 공감할 있는 대상에게 느낄 있는 감정이다. 우리가 소나 돼지의 감정에 미러링을 한다면 육식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채식주의자들은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거나, 의도적으로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인종이나 성별, 그리고 나이 등이 바로 계급으로 작동해 왔다. 인종, 성별, 나이의 계급 관계는 소위 인권의식의 성장과 함께 미세하게나마 극복되어지는 과정에 있는 하다. 하지만 자본, 아니 언젠가부터 자산에 의한 계급과 계급의 경계는 점점 선명해지고 있으며, 그 간극도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영화를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생충에서 계급의 경계를 구분하는 매우 훌륭한 메타포가 등장한다. 바로 냄새다. 계급에 냄새는 금세 지워지지 않는다.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냄새를 동경하고,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 가지고 있는 퀴퀴하고 이질적인 냄새를 혐오한다. 혐오가 송강호로 하여금 계급에 대한 저항을 유발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금수저들이 금수저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더 많은 기생충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금수저들은 우리사회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기생충의 피를 빨아 먹으며 존재하고, 기생충들은 다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금수저에 기생한다. 우발적이기는 하지만 송강호는 그러한 계급 질서에 저항하다가 제대로 된 피해자가 된다. 자본주의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그 질서에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기생하며 사는 것도 답이다. 그래서 더 씁쓸하다. 내가 그저 기생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듯, 흐지부지한 결론을 내 보겠다.
동시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은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주어진 것들이다. 내가 1619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어쩔 없이 미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어쩔 없는 상황에 누군가는 순응하고 누군가는 저항한다. 가지는 분명한다. 저항한다면 개인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희생의 결과가 만들어낸 떡고물은 억압에 순응해 왔던 비겁한 인류가 받아 먹는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용감한 유전자를 가진 몇몇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 아래를 개척하다 죽어갔다. 나무 아래를 개척한 용감한 유전자들의 희생 덕에 비겁한 유전자는 살아남아 찌질한 그들끼리 또다시 우월과 열등을 나눈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다. 

계급사회의 가해자가 것인가, 아니면 계급사회에 몸을 던져 저항하는 피해자가 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계급사회에서 '어쩔 없이' 생존하는 기생충으로 살 것인가? 봉준호 감독은 영화기생충 통해 우리 모두에게 계급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하다.

@Back2Analog

Comments 4

  • 기생충1 | 댓글주소 | 수정/삭제

    1. 노동자는 자본가의 떡고물을 노리는 기생충, 자본가는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2.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는 모체의 기생충, 그 중 인간은 성년이될때 가지 부모와 사회의 피와 땀을 양분으로 생존
    3. 살아 움직이는 모든것은 기생충인데, 그말이 아름답지 않아 예쁘게 꾸며놓은 말이 상생, 공생, 협력적 거버넌스
    4. "그래도 난 아니야"라고 우긴다고 해도. 지구에 해를 끼치는 기생충
    ps. 만물기생충

    의식의 흐름대로 써봤습니다. 저는 기생충1 입니다.

  • 체리보이 | 댓글주소 | 수정/삭제

    영화가 끝나고 이게 뭐야~~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곱씹어 보게 되는 영화..
    소수의 가진자들이 부의 대부분을 갖고 있는 이 나라에서
    없는 자들은 스스로 자생하지 못하고 가진자들에게 빌붙어 살수 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말해주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