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관점, '교육화'가 만든 교육의 구조적 문제

제3의 관점, ‘교육화’가 만든 교육의 구조적 문제

서울시교육청 채희태


    1. 序 

      2010년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교육지구 민선6기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국의 혁신교육지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지역은 역시 정보와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이다. 2013년 구로와 금천에서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서울의 혁신교육지구는 2014년 11월 17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글로벌 혁신교육도시 서울 공동 선언'을 통해 2015년 11개, 2016년 20개, 2017년에는 22개 자치구로 숨가쁘게 확대되어 왔다. 양적인 확대도 확대지만 ‘서울형’혁신교육지구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이 보다 밀접하게 결합해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의 “협업은 통한 분업”, “분업을 통한 협업”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지역과의 내용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그 내용과 확산의 정도는 다르지만 혁신교육의 전국적 확대는 입시와 경쟁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육의 가치와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덕양중학교 이준원 교장선생님이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학교혁신 방안”에서 교사의 주체적 노력과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교육문제해결이라는 혁신학교 운동의 성과를 중심으로 혁신교육지구를 바라보았다면, 홍익대 이윤미 교수님은 “지속가능한 혁신교육을 위한 거버넌스의 역할”에서 공교육은 물론, 학교 밖에서 역사적으로 시도해 온 다양한 교육운동의 맥락에서 혁신교육지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인 교육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기존의 노력과 성과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분업화와 전문화된 역사를 통해 하나의 사회체계가 되어 버린 교육의 문제를 진영의 논리에 빠져 주관적으로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교육의 구조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학은 과잉된 교육에 대한 기대로 인해 교육을 완전무결한 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일반적으로 관은 교육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무시한 채 교육을 밋밋하고 단순한 평면으로 인식한다. 교육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이 생각하는 교육의 모습은 울퉁불퉁하고 그 정확한 형체가 없다. 장님이 자신이 만진 부분을 일반화시켜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하듯, 교육거버넌스의 당사자인 민과 관과 학은 각자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교육의 모습을 우리사회의 ‘보편적’ 교육의 모습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혁신교육지구가 내 딛어야 할 첫걸음은 민과 관과 학이 지금까지 교육을 바라보고 있었던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벗어나, 교육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그 모습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여 필자는 두 분의 발제를 통해 정리된 혁신교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자칫 우리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를 제3의 관점을 더하고자 한다.  


      2. 교육과 교육제도

      인간은 유아기와 아동∙청소년기를 거치며 인류가 수 천 년 동안 이루어낸 진화와 문명화의 전과정을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함축적으로 학습해 낸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사는 다름 아닌 자연일 것이다. 발전을 거듭해 온 과학문명의 관심이 인간이 발 딛고 있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향하고 있는 21세기에도 자연은 마치 교실에서 말썽을 부리고 싶어하는 초등학생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엄격한 교사처럼 여전히 인류에게 두려운 존재이다. 

      자연의 일부에서 비롯된 인류가 자연에서 벗어나 첫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인류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어떠한 규칙도 읽어낼 수 없는 자연에게 신적 의미를 부여했다. 처음엔 경외 그 자체였던 자연의 거대한 섭리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인류는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러한 경험의 축적이 인류의 문화가 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하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관찰한 자연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예술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교사가 자연이고, 인류가 자연의 가르침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면, 인류의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라는 교육과정은 교사인 자연이 아닌, 학습자인 인간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인간은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교사인 자연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지만, 때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처럼 반항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상대적으로 향상된 독립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학습자의 본분을 망각한 인간의 그러한 태도는 이따금씩 자연의 분노를 사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인류는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해 왔다.

      그렇게 성장한 인류가 왜 인간의 내재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주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한때 토관과 신토(土官과 紳土)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영화, 사관과 신사(士官과 紳士)에서 교사라는 우월적 지위에 있던 하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에 의해 더 우월적 존재인 장교로 성장한 리처드 기어에게 거수경례로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교육을 교육 제공자의 입장이 아닌 학습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창의적인 성장 가능성에 경의를 표할 수는 없는 것일까? 


      3. 교육의 목적은 ‘성장’인가, ‘선발’인가?

      어찌보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 문제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주도해 온 인류의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학습의 모티브를 제공할 뿐인 교육 제공자의 주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교육의 주체는 학습자이고 교사는 지원자 또는 협력자일 뿐이라는 다분히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공식을 이제는 우리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때는 아닌지 제기해 본다. 

      교육은 인류가 축적해 온 지혜를 배우는 것이기에 행복해야 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에 희망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행복과 희망이 아닌 늘 고통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기준도 없이 상대적으로 세워지는 줄 안에서 단 한 명의 승자 외엔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경쟁교육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육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고, 학부모들이 짊어져야 하는 사교육비의 부담은 급기야 세계 제일의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교육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불행한 현실과 희망 없는 미래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교육의 불행은 교육이 무엇이든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또는 해결해야 한다는 과한 기대로부터 비롯되었다. 현대교육의 근간이 된 근대교육은 봉건시대를 지켜왔던 핵심 축이었던 귀속지위를 무력화시키고,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정해져야 한다는 성취지위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 필요성이 확대되어 제도화되어왔다. 부르주아혁명을 이끌었던 당시의 중산층 시민계급이 자신의 능력으로 축적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수세기를 거치면서 마치 유전자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귀속지위를 부정하고, 지위(계급)는 인간 개개인의 성취를 통해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렇게 제도화된 교육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귀속지위에 대한 반대가 단순한 반대에서 사회적 질서를 뒤흔드는 혁명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위 상승’ 따위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기층 민중들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르주아 계급은 교육이라는 제도를 자신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사용하는 동시에, 기층민들 또한 그 사다리에 자신들과 함께 오를 수 있음을 널리 홍보하며 혁명의 지지를 이끌어 냈을 것이다. 마치 조선을 건국하며 과거에 의해 선발된 관료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꿈꾸었던 정도전처럼….

      하지만 제한된 사다리에 모든 사람이 오를 수는 없는 법, 양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음지를 동반할 수밖에 없듯, ‘성취’ 또한 태생적으로 ‘경쟁’이라는 이면이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혁명을 통해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건설한 초기 자본주의의 핵심 이념이 평등이 아닌 자유(경쟁)임은 그래서 매우 상징성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비롯된 사회주의의 핵심 이념인 ‘평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라는 단어 안에는 경쟁의 결과에 따른 구조적인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불평등한 경쟁을 뚫고 자신들의 지위까지 올라오는 개천 태생 용들을 지켜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고정된 계급의 틀을 깨는 계급 상승의 도구였던 교육이 자본의 논리 안에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끝에 이제는 형식적 평등 뒤에 깊숙이 감추어 놓은 내용적 불평등이 광범위하게 작동하면서 어느새 계층 간의 이동을 제한하는 가장 강력한 억압의 망치가 되었다.


      4. 小結, 인류 진화의 키워드 ‘관계’

      인간과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인류의 결핍이 낳은 가장 풍요로운 산물이다. 인류는 생존에 필요한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관계를 선택했다. 그렇게 선택된 관계는 인류 진화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생존과 관계없는 능력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은 확대, 강화되어 온 것이 곧 인류가 걸어온 진화의 과정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관계가 아닌 강한 이빨과 발톱을 원했다면, 인류는 문명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 분명하다. 인류는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위해 분절적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관계를 보다 안정시키고자 하는 강한 정착의 욕구가 농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어디 그 뿐이랴, 인류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성’ 또한 갈수록 정교해지는 관계의 유지에 방해가 되는 ‘동물적 본성’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지고 보면, 제도와 관습을 포함하여 인류가 성취한 그 모든 문명은 관계를 위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of the 관계, by the 관계, for the 관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진 계급사회 또한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계가 있어야 그 유지가 가능하다. 마치 빙산의 일각이 빙산의 잠긴 부분을 딛고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처럼, 계급사회에서의 지배계급 또한 지배할 껀덕지인 피지배계급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결핍의 산물이고,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므로 결핍이 사라지고 나면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다. 계급이 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소유를 중심으로 발생한 것처럼,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과잉된 생산은 인간이 서로 구차하게 관계를 맺지 않아도 소비를 통해 모든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관계 해체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성취해 온 문명과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토대 위해 관계보다 소비가 익숙해진 상부구조를 가진 인류 앞에 이제 저성장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만약 빙산의 일각이 수면 아래 잠겨있는 부분을 잘라내고도 수면 위에 자유롭게 떠 있을 수 있다면?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윤을 챙기고 있는 자본가들이 구질구질하게 그 관계에 의존하지 않아도 이윤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다면? 한때 인간의 능력에 필적하는 인공지능의 개발에 대해 우려를 표했던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5년 10월 온라인 커뮤리티 레딧에 “기술의 발전이 불평등을 가속시키고 있다”며 “로봇보다 자본주의가 더 무섭다”고 경고했다. 스티븐 호킹의 경고처럼 4차 산업혁명 속에는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한 자본가들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면, 노동자와 관계를 통해 해소해 왔던 자본주의의 결핍이 사라지게 되므로 당연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 관계의 소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부연은 따로 하지 않겠다. 

      현재 우리의 발은 인류 진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관계를 무시하고 소비라는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북유럽 복지국가의 시작이 관계를 부정하는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노사대타협이라는 관계 개선의 결과라는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투쟁이 소모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투쟁이든 타협이든 관계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결론을 맺자면, 그래서 혁신교육지구는 첫째, 혁신교육지구에 참여하고 있는 민과 관과 학이 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교육의 문제를 객관화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둘째,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교육 문제의 원인을 민·관·학이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상대방에게 전가하고, 서로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 문제를 풀기 위해 학교가 이룩해 온 제도적 성과에 마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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