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언론의 공통점(※ 주의 교사와 기자의 공통점 아님)...

집단의 문제를 쉽게 개인과 일체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난 개인이 집단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집단의 문제가 곧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오히려 우리는 집단의 문제와 책임을 개인과 분리하는데 더 익숙하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집단인 국민과 나를 일체화시켜 자신의 문제라고 반성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개인과 집단의 일체감은 집단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비례한다. 집단이 가지고 있는 권위가 강할수록 그 집단에 속한 개개인은 집단의 권위가 곧 자신의 권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한민국의 최상층에 존재하고 있는 검사집단이다. 오죽하면 ‘검사동일체’라고 했을까!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개인으로서 불쾌감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꽤 권위가 있는 집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기준’과 ‘개인차'가 존재한다. 권위의 기준은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나아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가치'일 수도 있다. 개인차에 대해 부연하자면, 일반적으로 그 집단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치거나, 집단 의존도가 높은 개인일수록 더욱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외부 공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단의 권위에 부합하는 내용과 자격을 충분히 갖춘 개인에게 외부의 공격은 오히려 집단 내부에서의 차별적 우위를 점하는 좋은 기회가 되지만, 집단의  외곽에 위치해 있거나 표면에 겨우 묻어 있는 개인은 자칫 외부의 흔들기에 자신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정치 문제를 제기하면 정치인은 같이 맞장구를 친다. 혹시라도 사회문제와 관련한 교육의 책임을 거론하면 교육의 3주체 중 주로 교사들이 불쾌감을 표시한다. 언론은 그 규모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감히 대놓고 건드릴 수 없는 성역 안에 존재한다. 덧붙여 교육의 문제를 지적했을 때 난 교육의 3주체인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학생이 같은 크기의 불쾌감을 느끼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외부의 비판이나 비난에 누구는 불편한데, 다른 누구는 속이 후련하다면 교육의 3주체라는 말은 그저 허울뿐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언론을 구성하는 주체는 잘 모르므로 패쓰~


그럼, 교육과 언론의 공통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 아니 않는다. 

교육은 태생적으로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한다. 교육의 방향이 타자가 아닌 자신을 향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배움’이나 ‘성찰’일 것이다. 교육은 일반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검증된 지식은 제도적으로 합의된 지식이므로 본질적으로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지식이다. 또는 체제의 유지와 관련이 깊은 지식일 수도 있다. 지식의 양이 정해져 있거나 그 확장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시절, 교육은 그 권위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지식의 양이 학교의 담장을 넘어 거침없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지식을 통제(?)해 온 교육의 권위로는 더는 그 거센 팽창의 힘을 어쩌지 못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 나는 이러한 현상이 긍정적이라든지, 또는 부정적이라든지 하는 가치는 개입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이는 의도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자본의 효율적 성장을 위해 정보의 빗장을 살짝 풀었을 뿐인데, 그 영향력이 이 정도였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떨까? 교육이 지식을 가르친다면 언론은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교육이 직면한 문제와 비슷하게 언론 또한 무한 팽창하고 있는 정보로 인해 꽤 오랫동안 지켜온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듯 하다. 사실 공동체가 살아있고, 생존에 필요한 지식의 총량이 그닥 많지 않았던 산업사회 이전엔 언론이라는 것 자체가 그닥 필요하지 않았다. 농경이라는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는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사소한 정보, TMI까지 공유했으므로... 언론은 공동체의 물리적 사이즈가 마을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세계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보의 양과 그 팽창 속도는 가늠이 가능했다.

알아야 할 정보의 확장 속도와 그 확장된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해야 하는 인간의 인지 능력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졌다. 그리고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 안락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능의 진화를 포기한 인류는 소위 프렉탈급으로 복잡해진 빅데이타를 처리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탄생시켰다. 

언론은 무한대로 확장하고 있는 정보를 감당하기 위해 분업화와 전문화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다. 경제, 정치, 교육, 문화, 예술, 복지 등 과거 종합 신문의 섹션으로 크고 작게 존재했던 많은 분야들이 이제는 전문적으로 분화되어 모두 자신의 속한 체계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몰두하고 있다.


이렇듯, 검증된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나 새롭게 생산되는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은 태생적으로 그 시야의 방향이  외부를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그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정보가 무한 팽창하고 있는 시대적 변화에 교육과 언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놓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교육이 성장하기 위해선 교육 체계의 밖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언론이 그 쓸모를 다하기 위해선 언론 체계 밖의 ‘지적질’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었던 관계 능력이 소비를 통해 퇴화했듯, 교육은 가르치는 근육을 키우는 과정에서 가르침을 수용하는 근육이 퇴화되었다. 마찬가지로 지적질을 통해 단련된 언론의 근육은 언론에 대한 외부의 지적에 필요 이상으로 발끈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교육과 언론의 공통점은 필연적으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두 번째 문제로 이어진다.


둘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교육에게 전가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책임을 교육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근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에 바로 근대교육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한 시민계급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교육의 선발기능 강화로 이어졌다. 이제 아이들은 여전히 특정한 사회적 환경귀족, 상인 혹은 수공업자의 자식으로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가 나중에 무엇이 것인지는 적어도원칙적적으로 출생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시민계급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이유는 출생의 원칙 대신에 개인의 업적이라는 원칙이 관철된 귀족계급의 특권은 깨뜨려질 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상승도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직 선발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시민계급에게 루소(J.J. Rousseau) 교육소설에밀 통해아동은 작은 성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닌 독립된 존재이며, 이러한 이유에서 아동의 현재 삶은 성인의 미래에 의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주장하였다.[각주:1]

【근대교육의 종말】의 저자, Hermann Giesecke (1831–1900)


실력에 의해 지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부르주아지의 주장은 혈통 중심의 중세 권력 관계를 허무는 혁명적인 사상이었지만, 현재 소위 ‘Meritocracy’라고 불리는 실력주의는 오히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상으로 작동 중이다. 즉, 성공은 재능과 노력의 결과이며 당신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재능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불평등한 결과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행운이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이보다 확실하게 구분하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적대로, 비슷한 재능으로 비슷하게 노력하는 다른 수많은 사람은 그만큼 부를 이루지 못할까.[각주:2]


먼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다분히 가설임을 밝힌다. 합리적인 추론이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엔 내가 제시할 수 있는 학문적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부가 지위로 연결되지 않고 여전히 귀족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중세의 계급 시스템에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 인권이 아닌 계급이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중세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에게 지위는 노력에 의해 성취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현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위해 투표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가진 자가 아니라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가진 자의 논리로 무장된 그 자신이다. 부르주아지가 독립적으로 귀족들에게 대항해 시민혁명을 일으키기에는 오랜 시간동안 계급 의식에 찌든 중세의 아비투스가 너무 견고했다. 부르주아지는 기층 민중들을 분노를 혁명에 이용하게 할 기폭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굶주민 민중들에게 했다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라는 막장 발언이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원래 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도 오기 전,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했던 말이다. 


Enfin je me rappelai le pis-aller d’une grande princesse à qui l’on disait que les paysans n’avaient pas de pain, et qui répondit : Qu’ils mangent de la brioche.

최종적으로 나는 빵이 없다는 농부들의 말에 대한 고귀한 공주의 임시 방편 -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이자! - 대해 떠올렸다.[각주:3]


브르주아지들은 실력이 있다면 누구나 귀족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혁명을 통해 건설하자고 굶주린 기층 민중들을 꼬시지 않았을까? 내가 위대한 시민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을 너무 폄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지배했던 중세는 막을 내렸지만, 비인격체인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로 진입하게 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근대교육이 애초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지고지순의 가치는 아니며, 교육 행위에 대한 신념과 더불어 그 결과가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서도 일말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언론이 가지고 있는 책임의 회피 문제는 얼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평론(=언론?)이 지배하는 사회…”로 대신하고자 한다.


복잡해진 산업 사회 속에서  복잡함을 설명해  누군가가 필요하다이는 마치 농경사회에서 이해할  없는 자연 현상을 설명해  제사장이 필요했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현대사회에서 평론가는 과거 제사장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듯하다자본주의의 주인인 인격화된 자본마저도 평론가의  끝을 총이나 칼보다 두려워 한다평론은 자본화되거나 자본과 결합한다협의의 평론은 평론  자체이지만 광위의 평론은 언론과 나아가 미디어로 확장된다평론은 우연의 결과를 필연으로 포장한다또한 평론은 평론의 대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시장에  놓았을  성공을 예견한 평론가는 많지 않았다오히려 아이패드의  애매한 포지션을 비판했다디바이스 혁신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는 전문성이 필요한 미디어 생산보다 미디어 소비 생태계에 관심을 가졌다이는 디지털 음원 시장의 생태계를 바꾼 아이팟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디지털 시대가 만든 편리함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CD 마저도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디지털 음원인 MP3 빠르게 확산되었지만, MP3 음원을 P2P 확산시키고 있었던 냅스터1 미국음반협회와의 저작권 소송에 패하면서 디지털 기술의 결과인 MP3  길을 잃게 되었다스티브 잡스는 2001, MP3 유통 앱인 iTunes MP3 플레이어인 iPod  놓으며 앨범 중심의 CD 장악하고 있던 음악 생태계를  중심의 MP3 디지털 음원 시장으로 완벽하게 바꿔 놓았다주지하다시피 iPod 스마트폰 신드롬을 일으킨 iPhone 전신이다

스티브 잡스는 iPod, iPhone 이어 iPad 론칭에도 성공했다아이패드의 출시에 비판적 견해를 밝혔던 평론가들은 이제  다퉈 아이패드의 성공요인이 가지고 있는 필연성을 쏟아냈다아이패드의 실패를 예견했다고 일자리를 잃은 평론가나 문을 닫은 언론사가 있다는 얘길 들어보지 못했다평론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에 비해 매우 빈약한 책임을 지고 있다.[각주:4]


오해를 막기 위해 거듭 밝히거니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모두 교육과 언론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사회적 기대와 권위에 부합하는 책임의 무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교육은 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수단이며,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고발하는데 언론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드물다. JTBC의 타블렛 PC 보도를 통해 촉발된 촛불혁명과 박근혜 파면은 언론이 이 가지고 있는 긍정의 힘을 보여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탈근대로 나아가고 있는 사회에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최근 양승태 대법관의 사법 농단을 보며 아무리 독립된 헌법기관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판사라고 하더라도 신이 아닌 인간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판사도 인간이고, 교사도 인간이고, 기자도 인간이고, 그리고 대통령도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자신에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적용시키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회적 역할에게는 신에 근접한 당위적 책임을 요구한다. “대통령이, 기자가, 교사가, 그리고 판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로… 그럴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니까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인간의 역할에 신적 당위를 요구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범위는 작지만 비슷한 것이 또 있다. 바로 부모다. 신이 준 생물학적 능력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창조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신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부모는 스스로를 신적 지위에 위치시킴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스스로 신이 아닌 한계가 더 많은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자식이 자신의 피조물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임을 인정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과 언론에 대해 깊이 참조하면 좋은 글을 하나씩 소개하는 것으로 교육과 언론의 공통점에 대한 잡글을 마치고자 한다.


교육체계의 자기서술, 교육의 성찰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모든것이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 비난할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있다. 교육체계는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각주:5]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라는 말은 일단 미국에서 유래한다. 당시 미국의 언론사 뉴욕 월드(New York World) 사장 조지프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신문에 스포츠면을 마련하고, 흥미와 오락 위주의 일요증보판 발행, 1페이지 올컬러 인쇄, 만화 연재 화려한 비주얼과 선정적인 요소들을 부각시켜서 시장을 점령해갔다.

같은 시대 언론사였던 '모닝 저널' 사장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역시 자신의 막대한 자본력을 풀어서 신문시장을 독점하려고 하는데, 가령 예를 들면 신문 하나를 1센트에 팔아서 돈은 신경 쓰고 무조건 독자들이 자사 신문을 읽도록 만들어 버린다든가, 퓰리처가 운영하는 뉴욕 월드사의 인재들을 마구 빼온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물론 땅파서 장사할 리는 없고 그만큼의 수입을 광고료로 채워버리는 식이다.

둘의 대표적인 황색 전쟁의 사례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나왔던윌리엄 굴든수프 토막 살인 사건”. 잔인한 그림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기본이고 사설탐정 고용, 피해자의 동거녀의 아파트 임대, 상대편에 스파이 침투, 전화선을 멋대로 끊는 서로간에 개싸움을 이어갔고 온갖 찌라시를 실어 경찰의 수사에 방해가 되었으며, 범인이 밝혀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식자 뉴욕 월드는 죄없는 범인들의 가족과 이웃들의 신상을 보도했고 모닝 저널은 범인 명을 두고 누가 나쁜지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 둘의 판매부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신상이 낱낱이 파헤쳐진 윌리엄 골든수프와 범인들의 가족과 이웃들 수많은 피해자도 같이 남겼다.

개싸움의 종지부가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호건의 골목길(Hogan's Alley)" 작가인 리처드 아웃콜트를 거금을 주고 빼온 거였는데, 뉴욕 월드는 거기에 돈을 얹어 아웃콜트를 스카우트한다. 이에 맞서 모닝 저널은 거기에 얹어 아웃콜트를 스카우트하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스카우트 경쟁속에서 아웃콜트는 결국 모닝 저널을 선택했고, Hogan's Alley 모닝 저널에서 새로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뉴욕 월드는 호건의 골목길의 주인공인 "옐로 키드" 특허신청을 해놔서 괜찮다며 '조지 럭스'라는 작가를 스카우트 해와 노란 아이를 주인공으로 다른 만화를 연재시키기 시작했다. 개의 신문사가 작가의 손을 통해 같은 주인공을 그리는 사상 초유의 더러운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근데 설상가상으로 모닝 저널은 럭스까지 머니파워로 빼왔다. 황색 언론, 옐로 저널리즘이란 단어의 어원은 바로 신문 만화의 주인공, 옐로 키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어다.[각주:6]

<황색언론의 상징이었던 Yellow Kid>


@Back@Analog



  1. Giesecke, Hermann. 2002. 【근대교육의 종말】. 조상식 역. 내일을 여는 책. [본문으로]
  2. Frank, Robert. 2016.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정태영 역. 글항아리. [본문으로]
  3. 장 자크 루소, 참회록 [본문으로]
  4. "평론(=언론)이 지배하는 사회".(back2analog.kr/423) [본문으로]
  5. 전상진·김무경. 2010.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사회와이론】 17. [본문으로]
  6. 나무위키에서 발췌. (https://namu.wiki/w/황색언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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