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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근대교육의 종말

<SKY 캐슬>, 막장으로 시작해 상식으로 끝맺다.

by Back2Analog 2019. 2. 4.

<SKY 캐슬>이 마침내 비지상파 최고 시청률인 23.8%를 찍으며 막을 내렸다. 난 최종화를 보며, 혹시 ‘작가가 내 블로그의 애독자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다. 평소 내가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해 주장하던 세 가지 가치를 완벽하게 최종화에 녹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감에 쫓기고 스뽀에 시달리는 작가님께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아마 내 주장이 그닥 특별하지 않은, 그저 이 시대가 교육에 바라는 보편적인 상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KY 캐슬> 최종화에 대한 호불호가 이리저리 갈리고 있다. 현실에 맞지 않게 계몽적으로 끝나 <SKY 캐슬>이 아니라 <EBS 캐슬>이라는 둥, 결말이 진부해 ‘충격적으로 실망’이라는 둥… 이 시대에 더이상 기댈 것이 없는 우리는 혹시 드라마 작가에게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이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바람을 담은 <SKY 캐슬> 최종화…

교육은 그저 정치나 경제 같은 사회 체계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정치나 경제를 능가한다. 왜 그럴까? 한낱 사회화의 수단이었던 교육이 근대에 들어서 선발 기능을 중심으로 소위 개천에서 용을 만드는 전지전능함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교육엔 선발기능이 없었다. 귀족을 실력으로 뽑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중세는 계습이 혈통에 의해 귀속된 사회였다. 중세를 허물고 근대를 열어제낀 부르주아 혁명은 교육을 통해 지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시민 계급의 불순한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근대가 시작된 이후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개천을 떠나기 위해 모두 교육에 몰두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아무리 근대교육이 전지전능하다 하더라도 모든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 그래서 어쩌라구! 

돈이 넘쳐나는 상류층은 자신의 자식을 용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편한 돈을 사용한다. <SKY 캐슬>은 소위 상류층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돈을 어떻게 쳐바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사회의 계급은 수직적으로 존재하지만, 아직 수직적인 계급 체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아이들은 적어도 수평적인 제도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수직적 억압 관계라면, 아이들은 그러한 기성세대의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끈끈한 수평적 연대 관계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세대갈등의 핵심! 차기준이 쌍둥이 형제마저도 경쟁으로 내모는 아버지 차준혁한테 반항하는 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이다. 차기준은 자퇴하는 친구, 우주를 따라 과감하게 학습지를 집어 던지고 땡땡이를 친다. 그리고 차기준의 쌍둥이 형 차서준은 그런 차기준의 행동에 맞장구를 친다.


“야, 학교를 때려치우는 놈도 있는데 우리가 뭐, 하루 학교 재낀다고 뭔 일 나겠냐?”


사실 교육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막장 같은 현실을 끝낼 수 있는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상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상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이제 내가 블로그의 “근대교육의 종말”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매번 핏대 세워 주장하는 그 상식, 그리고 <SKY 캐슬> 최종화에서 녹인 그 세 가지 해법을 하나씩 읊어 보겠다. 


첫째, 교육의 문제로부터 나를 분리시키지 말자.

<SKY 캐슬> 최종화에서 곽미향은 빵에 있는 김영주를 찾아가 캐묻는다. 진짜 우리 가족을 파탄 낼 생각이었냐고, 혜나를 꼭 죽여야 했냐고… 김영주가 대답한다. 


어머니는 혜나의 죽음과 무관하십니까?


곽미향은 김영주를 탓하러 갔다가 자신도 혜나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온다. 그렇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현실의 문제는 우리의 무관심이, 때로는 우리의 무능이 만들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분리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나와 다른 이에게 전가한다. 예전에 교육청 소속 기관인 교육복지센터의 직원으로부터 교육청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또한 내가 만난 많은 교사는 교육청 공문 때문에 일을 못 하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한편 교육청 장학사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땐 이렇게 이야기한다. 교육부만 없으면 교육은 정상화 될 수 있다고… 누굴 탓하기 전에 내가 가진 권한으로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는 없을까? 이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너무 낭만적인가?

서울시교육청에서 혁신교육지구 담당자로 일을 할 때 모지구의 거버넌스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혁신교육지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교사들은 하나같이 마을이 학교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답했고, 소위 마을에서 참여한 활동가들은 학교가 마을에 문을 여는 것이라고 답했다. 얘기를 듣고 난 후 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제 조건을 달지 않고 서로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혁신교육지구인 거 같다고… 

교육을 주제로 한 막장 드라마 <SKY 캐슬>을 보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돈으로 실력을 사는 기득권층이 아니라, 그 지위에 오르고 싶어 안달이 난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공교육부터 사교육까지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고 입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KOREA 캐슬> 안에 살고 있다. 드라마 <SKY 캐슬>이 주는 가장 위험한 메시지는 “나는 저 정도까지는 아냐.” 라는 안도감이다. <SKY 캐슬>은 <KOREA 캐슬>을 바탕으로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해 재구성한 픽션이다. 그러니 <SKY 캐슬>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더는 무능과 무관심을 무기로 사회문제를 나와 분리해 그 원인과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말자. 

하버드생이 아닌 나이트클럽 MD를 하고있는 딸, 차세리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며 윽박지르는 차준혁의 모습에서 고등학교를 안 가겠다던 딸을 대하는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수학문제를 같이 풀자고 다가오는 딸에게 나도 모르게 느꼈던 안도감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도 <KOREA 캐슬>에서 자라난 찌질한 속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제발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나를 분리시키지 말자! 


둘째, 자신의 책임을 느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사과부터 하자.

얼마 전 나는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미안하다 1

내가 인간이라서 자연에게 미안하다

내가 남성이라서 여성에게 미안하다

내가 어른이라서 아이에게 미안하다

내가 나라서 내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다

존재 자체가 미안하다

나는…


출처: https://www.back2analog.kr/448 [Back2Analog]


미안하다 2

그런데...

나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나, 

교육, 

그리고 언론은...

왜 사과하지 않는 걸까? 


4년짜리 정치의 사과는 가식적이고, 

가르치는 교육은 사과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지적하는 언론의 펜 끝은 절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자본이 주인인 

자본주의 속에서

정치와, 교육과, 언론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고,

끼리끼리 모여 진영을 형성하고,

생존을 위해 강력한 내로남불을 장착하고...


그 와중에 나는

인간이라서 자연에게 미안하고,

남성이라서 여성에게 미안하고,

어른이라서 아이에게 미안하고,

내가 나라서 

내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고…


출처: https://www.back2analog.kr/450 [Back2Analog]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곽미향은 남편 강준상에게 가족과 함께 혜나에게 다녀오자고 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혜나에게 사과한다. 이어서 곽미향의 사과가 이어진다. 찐찐에게도, 그리고 우주에게도… 그 사과에 진심이 어려 있다. 찐찐은 뭐 이렇게 쑥 들어오냐고 놀라고, 우주는 곽미향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들인다. 사과는 곽미향만 하는 것이 아니다. 3대째 의사 가문을 부르짖던 시어머니 정애리는 자신의 초밥을 며느리 곽미향 앞에 놓으며 에둘러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예서는 우주의 사물함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포스트잇을 붙인다.


오글거리는 곽미향관 찐찐의 대화에서 우리는 자기 성찰과 진심을 담은 사과가 가지는 파급력을 확인할 수 있다. 


찐찐 : 언니 정말 대단해. 3학년 1학기만 잘 버티면 서울 의대 갈 수 있으니까, 언니가 입 다물고 있는 줄 알았거든. 예서 성적이 0점 처리되고, 자퇴까지 해야 될 줄은 나 상상도 못 했어. 내가 예서 네 살 때부터 쭉 지켜봐 왔잖아. 15년을 언니랑 예서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뻔히 아는데…

미향 : 음… 내려놓고 나니까 내가 왜 그렇게 살았나 싶어.

찐찐 :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까 나라면 절대 포기 못 했겠더라구. 언니랑 예서 정말 대단해!

미향 : 자기는 나보다 더 일찍 우주 풀어 줬을걸? 

찐찐 : 내가?

미향 : 응, 자긴 솔직하고 남의 아픔에 공감 잘하는 사람이잖아. 아무리 수한이가 우선이었어도 자긴 우주 생각해서 못 견뎠을 거야. 입장 바꿔 생각하기… 내가 그걸 제일 못하잖아.

찐찐 : 아, 이 언니 뭐야? 뭐 이렇게 갑자기 쑥 들어와?

너무 작위적이라고? 모든 관계를 소비로 대체하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위인 자기 성찰과 사과를 소위 오글거린다는 표현으로 금기시 해 왔던 것은 아닐까?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면 자기성찰과 사과가 뒤 따라야 한다. 더이상 상식을 저버리지 말자!


셋째, 교육의 문제는 5W1H 중, 무엇(what)과 언제(when)가 핵심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교육의 문제는 5W1H 중, 무엇(what)과 언제(when)가 그 핵심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 아니라 이 시대가, 또는 부모가 원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 반드시 고3 때, 그때 못하면 재수나 삼수를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가야 한다. <SKY 캐슬> 최종화에서는 많은 사람이 교육의 무엇(what)과 언제(when)를 포기한다. 영재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의대가 아닌 심리학을 선택하기로 한다. 곽미향의 시어머니인 정예리는 의사를 포기하고 만둣가게를 연 지인을 들먹인다. 이는 모두 교육의 무엇(what)과 관계되어 있다. 반면 유출된 시험지로 만점을 맞아 자퇴를 한 예서의 계획서를 본 곽미향은 계획이 너무 빡빡하다며 천천히 하라고 드디어 시기(when)의 뒷문을 열어준다. 학원을 알아보겠다고 하자, 예서는 이참에 자기주도학습이란 걸 해 보겠다며 시청자들의 손발을 오글거리게 만든다. 모범 답안은 역시 우주가 제시한다. 우주는 무엇(what)을 탐색하기 위해 대학에 갈 시기(when)를 늦추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여행을 떠난다. 

만약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자식들 공부와 관련해 이 무엇(what)과 언제(when)의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선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입시 경쟁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실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SKY 캐슬>의 성공 원인

나는 평소 문화콘텐츠의 성공 문법을 현실의 촌철살인적 반영이거나 또는 현실 결핍에 대한 철저한 대리만족이라고 주장해 왔다. 영화, <내부자들>은 전자의 대표적 예이고,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후자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내부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와 언론이 어떻게 유착관계를 형성해 왔는지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감독판에서는 엔딩 크레딧 중간에 신문사 주간 이강희를 통해 다시 한번 주제를 잘근잘근 씹어 관객들 입에 넣어준다.


"어이, 영화는 재밌게 보셨수? 영화의 내용이 팩트가 아닌 픽션이니 당신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지? 하지만, 만약 이 영화가 픽션이 아니라면? 아니 이보다 더 더러운 현실을 당신들이 목도한다면? 뭐, 당장은 흥분하겠지... 페북이나 SNS에 분노의 드립질도 해 대고... 하지만 오징어 씹듯이 질겅질것 씹다가 결국엔 그냥 뱉어 버릴 거 아냐?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가도, 친일파들이 나라를 두 번, 세 번 팔아 먹어도 뭐 그냥 다 잊고 잘 살잖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는 국민들이 세월호의 아픔에 젖어 있을 때, CIA의 작전을 방해하면서까지 한 명의 국민을 구해 내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특전사령관에게 성공한 인질 구출 작전에 무슨 책임이 있냐며 문제는 정치와 외교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거라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대통령이 등장한다. <태양의 후예>가 방영될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 박근혜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통해 대리만족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나도 그 장면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SKY 캐슬>은 현실의 촌철살인적 반영이라는 전자의 요소에서 출발한 드라마다. 많은 시청자들이 막장급 대한민국 입시 사교육, 그 끝판에 있는 수능 코디의 실체를 보며 광분했고, 그것이 드라마의 초기 흥행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회에서는 급작스럽게 문화콘텐츠 성공 문법의 두 번째인 대리만족으로 끝을 맺는다. 좋게 말하면 문화콘텐츠 성공 문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전자의 방식을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SKY 캐슬>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가 되었을 것이다. 스뽀에서 알려졌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처럼 비참하게 끝이 났다면 시청자들의 속이 후련했을까?  

사족을 하나 달자면... 예서네 가족이 떠난 자리에 아직 <SKY 캐슬>의 세례(?)를 받지 못한, 가장 전형적인 학부모(민자영)가 이사온다는 설정은 드라마 문법 제9장 27절 엔딩편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이런 뻔한 설정을 빼 먹고 끝냈다면, 또 빼 먹었다고 욕을 먹었을... 그러니 이런 뻔한 엔딩을 예측했다고 해서 너무 우쭐해 하지는 말자. 이건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SKY 캐슬>은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아니 더했다! 늦게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아 사회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나는 일찍이 사회학의 쓸모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진단에 있다고 역설해 왔다. 우리는 진단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 어떤 전지전능한 인간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개인화되고 있는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가장 간편한 해결방법이 없지는 않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데이터를 입력받은 슈퍼컴퓨터가 제시했다는 모든 인간을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모든 인류가 스스로 사라지는 쪽으로 문제 해결을 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누구에게도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거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지구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SKY 캐슬>은 대한민국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인 교육을 수면 아래에서 끄집어 내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우리 시대에 드라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 낸 것이다. 우리가 비평의 도마 위에 올려 놓아야 할 것은 드라마 <SKY 캐슬>의 작품성이 아니라, <SKY 캐슬>이 어렵게 올려놓은 우리 시대의 교육이다. 교육을 중심으로 서로에게 전제를 요구하거나 문제를 지적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잘못이 있다면 서로에게 사과하고, 그렇게 회복한 신뢰를 바탕으로 많은 주체들이 모여 교육이 아이들의 고통이 아닌 희망으로, 우리 시대의 골칫거리가 아닌 성장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어야 하지 않을까?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