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짜뉴스가 창궐하는가? (보론 : 가짜뉴스와 마을민주주의)

1. 가짜뉴스의 정의 (링크 클릭)

2. 가짜뉴스의 원인 (링크 클릭)

3. 가짜뉴스의 폐해 (링크 클릭)

4.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링크 클릭)

5. 보론 : 가짜뉴스와 마을민주주의


대학 때 학생운동에 살짝 발을 걸쳤던 적이 있다. 보통은 운동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오면 운동권의 상층부로 올라 가거나, 배후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거나, 흔치 않게는 소위 애국적 사회진출을 준비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 같이... 이도저도 아닌 대부분은 뒤늦게 철이 들어 도서관에 짱 박혀 취업고시생이 된다. 인생이 늘 뜨뜨미지근했던 나는 사실 운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기 보다는 나에게 속아 군대도 안 가고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자존심 섞인 의리를 지키기 위해 도서관에 짱 박히지도 못하고 총학생회 집행부가 되었다. 하루는 화가 잔뜩 난 후배가 총학생회로 나를 찾아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수업 거부 투표를 했는데, 수업 거부가 부결되니 수업 거부를 주도하던 친구들이 재투표를 요구했다고 했다. 이런 게 소위 운동권이 추구하는 민주주의냐고... 화가 나고 답답해서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난 그건 민주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후배를 위로했다. 그리곤... 나를 되돌아 보았다. 과거에 난 어땠을까? 난 수업 거부 결의 후,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친구들을 향해 수업 거부는 투쟁에 참여하겠다는 민주적 합의인데, 어떻게 그 민주적 합의를 지키지 않고 등교를 거부하냐고 목에 핏대를 세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수업 거부가 부결되었을 때, 당장의 투쟁을 포기하고 민주적 합의를 지키기 위해 그 수업만큼은 참여했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수업 거부는 단지 투쟁에 더 많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난 민주적 합의를 지킨 적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재투표를 요구하는 후배들과, 신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단지 민주주의를 수단화했던 나는 무엇이 다른가?

그때 있었던 운동권이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학교가 아닌 마을을 무대로, 그때와 그닥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마을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시대의 요구와 어긋나 있는 그들만의 추억과, 그들만의 신념과, 그들만의 합의와, 그리고 그들만의 대표성으로 무장한 채...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극우만큼이나 위험한 극단의 진보다.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는 결과가 아닌 그저 의도에 머문다. 신념을 지킨 결과가 신념에 반하는 결과로 이어져도 책임을 지기는 커녕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자신은 그 잘난 진보적 신념을 지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뉴스를 신뢰할까? 어제(2019년 4월 23일) 주진우 기자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형집행정지를 신청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건강 검진 결과를 브리핑했다. 그리고 허리 디스크로 형집행정지 된 전례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 후배이기도 한 주진우 기자의 말을 신뢰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음모론자이긴 하지만 김어준의 관점도 지지하는 편이다. 일상에 바쁜 나는 단지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뿐,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가짜뉴스가 된다. 의심해야 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검진했던 의사는 믿을 수 있는가? 정말 허리 디스크로 형집행정된 전례가 없는가? 전례가 없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첫번째가 되는 전례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우리가 박근혜 정권 때 품었던 그 의심 그대로, 현 정권의 모든 행위는 다른 신념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어떤 의심은 합리적 의심이고, 어떤 의심은 부도덕한 의심이라고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감정이 섞이니 글이 오락가락한다. 어쨌든!!!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에 의존하고, 집단은 그런 개인들로 인해 구조화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그 안에서 나 또한 어설픈 존재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이런 시대에 누군가에게 예의를 요구하는 행위는 스스로 꼰대임을 커밍아웃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난 지나가는 개한테도, 말을 못하는 갓난 아이에게도, 그리고 내가 낳고 키우고 있는 자식들에게조차 나의 주관적 경험과 가치의 기준으로 예의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 어떤 예의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얼마전에 예의를 요구 받았다. 그것도 가장 신뢰하고 싶었던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그래서 영화를 개봉한 후, 그 영화에 담은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을 위해 사족을 붙이고 싶어 감독의 마음을 생각하며 가짜뉴스에 대한 보론을 구질구질하게 쓰게 되었다. 나의 이 사족이 내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허나 어쩌랴, 길이 놓여 있는데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러니 나의 속 좁음을 마음껏 비난하시라!

@Back2Analog


Comments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