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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시대 진단

덴마크에도 왕따가 있을까? (직접 민주주의와 과대대표)

by Back2Analog 2019. 6. 13.

선망의 대상인 복지국가 덴마크... 덴마크에도 왕따가 있을까? 2017 덴마크 정책연수에서 덴마크 사람한테 직접 들은 얘기다. 덴마크에서도 자기 얘기만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 사람은 왕따가 된다고 한다. 아마도 1/n 뿐인 개인이 큰목소리로 2/n, 3/n, 심지어 n/n 목소리를 내는 과대대표를 방지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쌓인 문화이리라...

직접 민주주의 시대, 과대대표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은 완장의식이 마치 유전자처럼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근현대사를 관통해 왔다. 일제에서 해방되자마자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되었고, 동족끼리 학살을 하는 전쟁까지 치뤘다. 분단 과정에서 다른 (북한?) 틀리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다르다고 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 있었던 유신을 겪었고, 과정에서 왜곡된 전쟁의 상처만을 기억하는 기성세대와 혁명을 통해서라도 천박한 자본주의를 갈아 엎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년학생들 간의 세대 대립이 있었다. 안에서 개인이 살아남을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을 계층 사다리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자식한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대한민국의 학부모를 입시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로 만들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상생이 아닌 대립의 역사, 보완이 아닌 대체의 경험을 통해 이룩한 결과라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성난 민중들이 지도자를 권좌에서 끌어 내린 시민혁명은 프랑스 대혁명보다 200년이 흐른 뒤에나 일어났다. 덴마크의 왕따 문화는 200 동안 차곡차곡 성장한 시민의식의 결과다.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 목소리에 집단이 좌지우지되는 ,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200년의 역사 속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표를 무시하고, 제도에 기반해 행정 권력을 위임한 공무원에게 막말을 한다. 물론 대한민국의 정치와 행정이 충분히 그럴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와 행정의 수준을 시민의 의식과 분리시켜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은 직접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숙된 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 
In a democracy people get the leaders they deserve.
 - Joseph de Maistre

조제프 메스트르의 말처럼 모든 나라는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정치의 수준이나 행정의 방향이 시민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드라마 "SKY 캐슬" 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탐욕을 확인했고, "90년생이 온다"를 읽으며 나도 모르는 꼰대성을 자각했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을 통해 또한 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는 벌레임을 깨닫게 되었다.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회의를 하거나 논쟁을 하는 등의 사회적 행위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있는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나는, 내가 주장하는 (주관) 주장의 결과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의 생각(객관) 절합된 존재이다. 
과대대표된 타인을 경계하고, 이전에 나의 목소리가 타인에 비해 높아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겠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에 말을 할 때 과도한 힘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자주 목도한다.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고, 성대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 금방 목이 쉬어 버린다. 챙피한 이야기이지만 더 과도한 성대 노동을 필요로 하는 노래를 할 때가 훨씬 더 편안하다. 아마도 대화의 상황은 상대방의 피드백에 대응해야 하지만, 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존중과 예의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의를 차렸을 때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억울한 역사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은 집단적 억울함이고, 시대가 부여한 억울함일 수도 있다. 정확히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억울하다’는 의미의 단어는 외국어에는 없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일 수 있다. 첫 번째, 우리 민족이 겪은 '억울하다'는 감정을 다른 언어권에 살고 있는 민족은 안 겪었을 수 있다. 두 번째, 우리가 느끼는 억울한 감정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에게 억울한 감정을 느끼게 한 타인을 향한다. 즉, 우리는 유전적으로 자기성찰을 못하는 민족일 수 있다. 

촛불혁명을 통해 우리는 국가를 위해 존재해 왔던 국민에서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성숙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탓하기가 아니라 자기성찰이다. 현재 내가 탓하고 있는 그 누군가도 사회적 구조의 피조물로서 어쩔 수 없는 억울함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