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문화+교육/근대교육의 종말

혁신교육에 대한 오해와 진실

by Back2Analog 2019. 8. 10.

※ 본 원고는 2019년 교육자치 컨퍼런스에서 시흥시가 주최한 "한국형 지방교육자치 모델" 토론회 토론문입니다.

먼저, 새로운 교육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는 시흥시에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2011년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교육지구가 서울, 부산, 인천, 충북 등으로 확산되어 민선 7기 들어서는 전국 226개 자치구 중 143 자치구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경기도교육연구원에서 마련한 FGI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경기도는 혁신교육지구 앞에 ‘◯◯형’이라는 지역명을 따로 붙이지 않는다는 백병부 연구원님의 부심 가득한 말씀에 부러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교육의 물줄기가 전국으로 퍼져나가 작금의 진보 교육감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위기의 상황을 위로하기 위해 위기가 곧 기회라고 말하곤 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혁신이 일어났던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17개 시・도 교육청 중 14명이 진보 교육감인 현재의 기회가 자칫 위기로 이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교육의 키를 진보진영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진보 교육이 그 기대와 바람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장차 교육은 더 큰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위기가 기회이듯, 기회는 곧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1. 혁신(革新)에 대한 오해와 진실
대학 때 얼핏 흘려들었던 ‘랑그’와 ‘빠롤’을 제가 글에서 인용하리라고는 사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시흥시 교육청소년과 이덕환 과장님은 시흥의 한국형 지방교육자치 모델을 소개하는 발제글에서 “혁신이란 ‘랑그'가 지닌 의미가 현실에서 실천되는 ‘빠롤’과 괴리로 나타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좌와 우가 경제적 성장을 위한 이견이 아닌, 서로 배척하고 나아가 반드시 소멸시켜야 할 정치적 대상으로 여겨왔던 대한민국은 ‘혁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도 양극화 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혁신이라는 단어는 언젠가부터 진영을 가르는 표식이 되었고, 그래서 누군가는 그 말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경끼[각주:1]를 일으키며 경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 경향성은 애초에 혁신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었던 ‘랑그’와는 무관하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빠롤’이 이념과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형성된 근대에는 ‘랑그’의 힘이 강했겠지만, 개인이 집단을 압도하고 있는 현재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빠롤’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저는 ‘혁신’이라는 랑그에 대한 합의를 먼저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 왔습니다. 피(皮)와 혁(革)은 모두 동물의 가죽을 뜻하는 한자어입니다. 이미 ‘피’라는 한자어가 있는데 왜 중국 사람들은 굳이 ‘혁’이라는 한자어를 또 만들어 사용했을까요? 마치 매일 보는 눈(雪)을 구별하기 위해 백 개가 넘는 단어를 사용하는 에스키모처럼 같은 가죽이라도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문자(文字)의 어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허신[각주:2]의 설문해자(設文解字)[각주:3]에서는 피와 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 놓았습니다.

피(皮) : 짐승의 가죽을 벗긴 것
혁(革) : 짐승의 가죽에서 털을 제거한 것

동물에서 벗겨낸 자연 그대로의 가죽에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더해져 털을 제거한 것이 바로 혁(革)입니다. 혁신이라는 말은 근거도 없이 막연한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시작된 누군가의 주장처럼 사람의 가죽을 벗겨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혁신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아마도 혁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시작된 의미와 무관하게 한때, 혁명(革命)이라는 강력한 단어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혁신이라는 ‘랑그’와 무관하게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은 혁신도 좋아하며, 혁명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혁신도 거부하는 ‘빠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혁신교육은 언젠가부터 사회의 보편적 성장과 무관하게 존재해 온 교육이 다시금 사회적 쓸모를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각주:4] 이는 인간을 사회의 일부가 아닌 사회 환경의 일부라고 주장한 니클라스 루만의 말처럼 교육이 자신의 확대재생산에만 몰입하게 되면서 ‘혁’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혁신교육은 교육을 다시금 인류의 보편적 성장을 위해 작동하는 ‘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본 필자, 핏대 세워 주장하는 바입니다.[각주:5]

2. 지속가능한 혁신교육을 위하여
저는 운이 좋게도 2015년부터 2017년, 서울시교육청의 서울형혁신교육지구 담당으로 일하면서 서울의 여러 자치구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혁신교육지구의 거버넌스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민과 관이 자치구라는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혁신교육지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한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에 저는 편의적으로 자치구에서 추진하고 있는 혁신교육지구의 거버넌스를 주도형과 갈등형으로 분류해 본 적이 있습니다.[각주:6] 주도형은 민 주도형과 관 주도형, 그리고 구청장 주도형이 있었으며(차성수 이사장님 죄송합니다. ㅠㅠ), 갈등형은 민・관 갈등형, 민・민 갈등형, 그리고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이 부딪히는 관・관 갈등형이 있었습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민과 관이 큰 소리 안내고 협력하는 잔잔한 거버넌스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지속가능한 혁신교육을 위해 반드시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가능한 혁신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주도의 문제도, 갈등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덧붙여 서울시교육청에서 서울형혁신교육지구 운영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만들며 과연 이 조례가 혁신교육지구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 자치구의 민과 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허무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쉽게, 그리고 지나치게 제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상대적’으로 간편한 제도에 손을 댑니다. 영화 “넘버3”에서 욕쟁이 검사로 등장했던 최민식은 깡패로 분한 한석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X같아 하는 말이 뭔지 아나?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말 X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X같은 XX들이 나쁜 거지.”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와 결합하지 않은 상태의 ‘죄’는 가치가 배제된 개념어일 뿐입니다.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도는 제도를 실행하는 인간이라는 주체가 결합되었을 때 문제를 일으키거나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도와 결합한 인간의 문제를 성찰하지 않은 채 간편하게 제도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만들라고 분신하지 않았습니다. 버젓이 있는 법 안에 적혀 있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제도는 시민의 성장을 내제하거나, 전제하거나, 지향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2012년 세계에서 7번 째로 2050클럽[각주:7]에 가입한 매우 잘 사는 나라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 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성장에 걸맞게 매우 우수한 제도를 선진국으로터 이식해 들여왔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빠른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그에 걸맞는 시민의 성장이 ‘보편적’으로 뒤따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갈등과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과 충분한 합의에 기초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혁신교육지구를 통해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이 분리되어 있는 대한민국 교육제도의 한계를 실천의 과정에서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육지원청은 파트너로서 지자체가 갖는 자치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반 자치는 기초자치단체까지이나 교육 자치는 광역 단위여서 지자체의 파트너인 지역교육지원청은 도교육청의 정책을 행정적으로 집행하는 역할 밖에 할 수 없었다. 거버넌스를 해야 할 대상이 권한이 없으니 허울뿐인 거버넌스였고, 그 속에서 지자체와 교육지원청의 갈등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지역도 다수 생겨났다."[각주:8]

민선6기 금천구청에서는 한국 지방자치 역사에 한 획으로 기록될만한 의미 있는 실험을 한 바 있습니다. 관료가 아닌 민간인 출신의 황석연씨를 금천구 독산4동의 동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비록 동의 주민이 직접 선출된 동장은 아니지만, 구의 행정이 상명하복식 일방향의 지시에서 벗어나 현장 주민의 요구가 아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덕환 과장님의 지적대로 현재 혁신교육지구의 관・관 거버넌스는 제도적 한계가 분명합니다. 차성수 이사장님 또한 “Ⅳ. 이중의 자치 또는 교육의 분권과 자치”에서 “직선교육감의 등장으로 지방교육자치의 변곡점이 시작된 것은 맞지만, 구호나 슬로건이 아닌 체감된 현실로 교육혁신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지역에 밀착된 중간단위조직인 교육지원청의 필요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비약하자면 지속가능한 혁신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은 누구의 주도도, 제도의 변화도 아닌 교육 거버넌스를 구성하고 있는 주체, 즉 시민의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은평구청에서는 민선 7기 조직진단을 바탕으로 일반행정이 해야 할 교육의 방향을 시민의 성장 지원으로 정하고 전국 최초로 “시민교육과”를 신설하였습니다. 성장에서 선발 기능이 추가된 근대교육은 태생적으로 선발에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 교육을 혁신한다고 해도 이 부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대한민국의 근대교육은 부르주아 혁명을 바탕으로 18세기에 시작된 서구보다 훨씬 빠른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회화의 도구였던 교육이 선발 기능으로 인해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개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용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겼다.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스승은 임금과 부모와 동격, 아니 그 이상이었다. 임금이나 부모가 할 수 없는 계층 상승을 스승을 통해서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말이 바로 ‘군사부일체’다. 정성원은 ‘현대한국사회의 대다수 학부모들이 자녀의 미래설계와 관련해서 한 번은 생각했을 인생지도는 태교/원정출산 → 탈세 및 자녀상속/위장전입 → 영어유치원/특목고/SKY입학 → 병역면제 → 자기계발 → 신위 등’이라며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과잉 교육화된 사회’(정성원, 2013: 281)라고 비판했다.[각주:9]

혁신교육은 교육의 무게 중심을 ‘개인의 선발’에서 ‘시민의 성장’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대는 학교보다는 마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의 과제가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근대 이후 교육의 과제는 선발과 성장의 균형입니다. 선발은 피교육자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성장은 피교육자의 내적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반복해 온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도한 선발을 성장으로 대체하거나, 성장을 외부적으로 측정하기 어렵다고 하여 선발 기능으로 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와 평등이 그렇듯, 교육에 있어서 선발과 성장은 상호 보완 관계입니다. 선발 기능 중심으로 조선시대 이후로 작동했던 학교 교육을 성장기능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옳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혁신’은 사회적으로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 해석되지만,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공교육의 모델을 찾자는 혁신학교나 공교육의 지역적인 혁신을 하자는 혁신교육지구는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나라 교육과정 총론에 제시한 ‘민주시민 양성’으로 그 목표가 귀결된다.[각주:10]

선발기능 중심으로 작동해 왔던 대한민국의 학교교육이 성장이라고 하는 교육의 또 다른 기능을 얼마나 이해하느냐, 그리고 주로 부정적으로 작동해 왔던 교육의 선발기능을 혁신교육이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민주시민 양성’의 보이지 않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3. 시민의 성장을 위하여 
시민의 성장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부족한 경험을 바탕으로 감히 말씀드리자면 가장 먼저 “이견에 대한 태도”를 꼽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200여 년에 걸쳐 이루었던 경제적 성취를 단기간에 이루어 냈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의도와 무관하게?) 갈등의 해결을 통한 민주적 합의보다는 독재정권 하에서 중앙정부가 주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방해가 되는 이견은 늘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이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정치에서 경제로, 경제에서 문화로 확산되어 고착되어 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금지된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와 종교입니다. 이견과 이견이 만나 발전적인 결론으로 이어진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정치와 종교라는 주제는 커뮤니티라는 관계를 파괴하는 호환마마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베스트셀러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90년생이 온다』에 나오는 꼰대 테스트 중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은 공적인 시간이다. 싫어도 팀원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가치 이전에 개개인의 취향마저도 권력에 의해 지배 당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이견은 크게 가치와 취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시나브로 우리는 취향이 가지는 이견은 어느정도 존중하고, 존중받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견 중 가치를 다루는 문제는 여전히 쉽지 않아 보입니다.

두 번째는 ‘인지부조화’의 극복입니다.

"이론과 현실이 자꾸 어긋날 때 이론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현실에 맞게 이론을 수정하든가, 아니면 이론의 완전무결함을 믿으며 현실을 부정하든가. 코르슈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내 이론이 잘못된 게 아니라 현실이 미친 거야.“[각주:11]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우리사회에서 신념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신념은 관계를 동반하고, 그 관계 안에는 힘든 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이 배어 있습니다. 신념의 권한이 개인에게 귀속되어 있었다면 까짓거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듯 쉽게 신념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념은 진영논리로 강하게 묶여 서강대 사회학과 손호철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대한민국을 반지성의 사회로 만들었습니다.[각주:12] 대한민국에서는 ‘무엇을 주장하느냐’ 보다 ‘누가 주장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치는 정보와 결합해 시간이 갈수록 분화되고 있는데 신념은 여전히 진영과 결합된 채 좌와 우로만 존재하고 있으니 이 인지부조화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필연에 더해 '우연에 대한 허용'입니다.

행운이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이보다 확실하게 구분하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적대로, 비슷한 재능으로 비슷하게 노력하는 다른 수많은 사람은 왜 그만큼 부를 이루지 못할까?[각주:13]

지금은 열심히 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면 그 노력에 열매로 보답하는 농경사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농경의 유전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근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단순히 열심히 살면, 그 결과 빛나는 성공이 우리를 맞이할까요? 오죽하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요? 이 사회를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는 모르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노력이 반드시 그에 걸맞은 필연적 결과인 성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보의 빅뱅과 불확실성의 가중으로 결과는 노력이라는 필연보다 운이라고 하는 우연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아니, 노력과 무관하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우연의 결과를 실력과 노오력이라는 필연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4. 교육에 대한 진단과 처방, 그리고 혁신교육
차성수 이사장님은 발제문에서 현재 우리가 처한 교육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해 주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근대교육에 기대했던 계층상승의 신화가 붕괴되었다. 둘째, 고정된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 시스템이 지식의 변화와 확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셋째, 둘째와 관련하여 교육의 주체인 교수자와 학습자의 비효율적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넷째, 고령사회에 대응해야 하는 교육의 새로운 목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평균의 종말』의 저자 “토드 로즈”는 책의 서문에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교육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선발’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탑재했듯이 우리는 근대의 많은 가치들이 무너져 가고 있는 지금, 근대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 교육에서 하루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산업자본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인간이 직접 생산해 왔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할 일도, 기계가 할 일도 모두 인간이 분업적 체계 안에서 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혁명을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감당해 왔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기계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인간과 인간이 분업했던 시대를 지나, 인간과 기계가 분업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기나긴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로 이어진 사건이 바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4차 산업혁명, AI의 등장입니다. 농경 시대에 인류는 농사의 경험이 많은 어른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는 어느 정도 제한된 지식의 양으로 지위가 결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래 사회에도 그러한 경향성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인류는 2017년을 기준으로 매년 16ZB[각주:14]의 데이터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하루에 482억GB, 초당 56만GB, 이를 영화 파일의 데이터 크기로 환산하면 1초에 영화 28만 편이 탄생하고 있는 셈입니다.[각주:15]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매초마다 데이터 빅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식의 집합체인 데이터가 무한 확장하면서 지식의 양보다 그 지식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접속하느냐, 그리고 그 지식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교육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세돌이 알파고에 무릎을 꿇는 순간을 지켜봤고, 세계 바둑 1위 커제 역시 알파고에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이용해야 할 수단이지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을 통해 인공지능과의 대결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5. 에필로그와 제언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여운이 남아 있는 “미스터 션샤인”... 그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은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에게 자기 몫의 보리쌀을 건냅니다. 애나 어른이나 배 고픈 건 매한가지라며 거절하는 아이의 엄마에게 고애신은 ‘고픈 배는 매한가지나 아이가 굶는 것은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말한 후, 아이들에게 보리쌀을 나눠 줍니다.  

“사과의 뜻이란다.”

인간은 유아기와 아동청소년기를 거치며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루어낸 진화와 문명화의  전과정을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함축적으로 학습해 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사는 다름 아닌 자연일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교사인 자연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지만, 때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처럼 반항하기도 하였으며, 또 때로는 상대적으로 향상된 독립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학습자의 본분을 망각한 인간의 그러한 태도는 이따금씩 자연의 분노를 사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인류는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인류가 왜 인간의 내재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주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한때 토관과 신토(土官紳土)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영화, 사관과 신사(士官紳士)에서 교사라는 우월적 지위에 있던 하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에 의해 더 우월적 존재인 장교로 성장한 리처드 기어에게 거수경례로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교육을 교육 제공자의 입장이 아닌 학습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창의적인 성장 가능성에 경의를 표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어찌 보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 문제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주도해 온 인류의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학습의 모티브를 제공할 뿐인 교육 제공자의 주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육의 주체는 학습자이고 교사는 지원자 또는 협력자일 뿐이라는 다분히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공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혁신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현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기꺼이 무상교육을 합의했던 북유럽의 교육 선진국들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를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아이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격이 없는 학생이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당당한 민주 시민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풀지 못한 인류의 숙제들을 풀어낼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back2analog

  1. 표준어는 경기(驚氣)가 맞습니다만 의미의 전달을 위해 소리나는대로 표기했습니다. [본문으로]
  2. 허신(許愼)은 후한 중기의 학자로, 중국 최고(最古)의 자전 《설문해자》의 저자이다. [본문으로]
  3. 한자를 처음 만들어질 때의 뜻과 모양 그리고 독음(讀音)에 대해 종합적으로 해설한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 [본문으로]
  4. 교육체계의 자기서술, 즉 교육의 성찰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 ‘모든’ 것이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이를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 (전상진·김무경. 2010.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본문으로]
  5. 모든 체계는 맹목적으로 자기(재)생산에만 몰두한다. 루만은 바로 이 점에서 흔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제나 정치 외에도, 교육소통의 무능력, 맹목성, 확장성을 지적한다. 교육체계는 성찰이 필요하며, 이 성찰은 교육학과 교육사회학의 몫이다. (이철. 2016. “끊임없이 확장하는 소통의 의미장 … 루만의 ‘교육소통’이란?”. 교수신문) [본문으로]
  6. 서울형혁신교육지구 교육거버넌스의 갈등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가 2018년에 쓴 석사학위 논문, “교육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 사례 연구”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본문으로]
  7. 손석희. 2012. “한국 '20-50 클럽' 진입…세계 속의 대한민국, 어디쯤?”. JTBC [본문으로]
  8. “한국형 지방교육자치 모델, 시흥에서 소개합니다” 발제문 중 [본문으로]
  9. 채희태. 2018. “교육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 사례 연구” [본문으로]
  10. “한국형 지방교육자치 모델, 시흥에서 소개합니다” 발제문 중 [본문으로]
  11. 전상진. 2018. 『세대 게임』. 문학과 지성사. P 202. [본문으로]
  12. 손호철. 2019. “반지성의 사회 대한민국”. <http://bitly.kr/dZZLfY>. 한국일보. [본문으로]
  13. 로버트 프랭크(Robert H. Frank). 2018.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정태영 역. 글항아리. [본문으로]
  14. 1ZB(Zeta Bite) = 1021bite, 1GB = 109bite, 1TB = 1012bite [본문으로]
  15. 연합뉴스 “'데이터가 곧 자산'…1초에 56만GB 생성”. (2017/7/15). (http://bitly.kr/Se2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