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덴마크 교육연수 0.5일차

덴마크에서의 1박... 인천공항에서 헬싱키까지 9시간이 넘는 비행과 목적지인 코펜하겐으로 가기 위한 4시간의 대기, 그리고 다시 1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코펜하겐에 도착. 중국식이라고는 하지만 국적을 떠나 한국과는 또다른 형태로 가공된 저녁(사진을 못 찍었다. ㅠㅠ)을 먹고 호텔에 짐을 푸는 오로지 이동에만 투여된 강행군... 몸이 어지간히 무거웠지만 여행 가이드의 예언대로 새벽 3시 즈음 귀신같이 눈이 떠졌다. 한국시간 대략 10시... 배가 고파 눈이 떠지는 거니 머리맡에 초콜릿을 두고 자다가 먹고 다시 자라는 조언을 실행에 옮겨 보았지만, 잠을 청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잠을 쫓고 말았다.
오늘은 토요일... 간단한(?) 문화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 보니 하루 내내 길을 잃지 않으려고 깃발만 쫓은 것 같다. 깃발만 쫓을 요량으로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텐데... 하지만 여행의 일탈은 꿈도 꾸지 못한다. 휴가철 끝물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가이드의 경고도 그렇고, 애초에 집단이 합의한 연수의 목표가 지엄하기 때문이다.

연수단이 묵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호텔

다시 잠을 청하긴 그른 것 같고, 내가 자주하는 한국의 교육 연수에 대한 핀란드, 덴마크 관점의 외부 서술을 한번 해 보고자 한다. 핀란드, 덴마크 사람의 입장에선 뭐 볼 게 있다고 한국에서 그렇게 뻔질 나게 오는지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매번 같은 질문에 짜증이 나기도 할 것이고... 아닌게 아니라 얼마전 울산에서도 다녀갔고, 우리가 돌아가고 나면 9월에 또 다른 자치구 연수가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고양이가 쥐 생각한다고 (쥐가 고양이 생각을 하는 건가?) 해외 연수를 와서 현지인의 입장을 지나치게 고려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매번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그들의 고통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성숙한 시민의 자세라 생각한다. 진짜 궁금해서 미치겠으면 당연히 질문을 해야 한다. 그것이 피같은 세금으로 연수를 온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질문을 할 때 저 사람이 같은 질문을 수백번 받았겠구나... 하는 최소한의 마음가짐 정도는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내가 한국을 떠나 오며 ‘교육 망명’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한국의 교육 상황은 처참하다. 어제도 밝혔듯 교육이라고 하는 효과적 수단을 국가 차원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그저 개인이 보다 높은 지위와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 사용하는 투쟁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한 개인의 요구에 부응하듯 한국의 교육은 단 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공적, 사적 예산을 쏟아 붓는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 선발된 사람은 그 노력과 사적 투자를 보상 받기 위해 남은 여생을 보낸다. 그렇다면 불행하게도 더 많은 노력과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에 실패한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 대한민국 사회 곳곳을 배회할지도 모른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기는 했으나 본질적으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국가차원에서 해야 할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어야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한 간극의 해소이다. 사회 문제는 주로 기대와 현실의 간극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렇다면 교육 문제는? 선발에 대한 기대와 선발되지 못하는 현실 간의 간극이 바로 대한민국 교육 문제의 핵심이다. 서양에서는 18세기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전통적인 교육의 기능이었던 ‘사회화’에 선발 기능이 탑재된 근대교육이 시작되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에 의해 이미 15세기에 근대교육이 시작된다. 이대 석좌교수를 지냈던 한용우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를 전수 조사한 결과 40%가 평민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낸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승은 임금도 부모도 할 수 없었던 계층 상승을 가능하게 해 주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뻐뜨,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러한 기대를 교육이 해결할 수 있는가?

얼마전 중국의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사례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뉴스에서도 여러 차례 보도된 바와 같이 아마 중국은 음성인식 분야에서만큼은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기술의 성취를 교육 분야에 공격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중국의 사례를 들으며 왜 그럴까를 고민해 봤다. 내 생각은 이렇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미국과 어깨를 맞대는 명실상부한 G2로 올라섰다. 이제 중국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은 지방정부가 연합한 연방정부위 형태로 존재하지만 중국은 그 넓은 영토를 중앙집권의 형태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최근 범죄인 인도 법안으로 인해 촉발된 홍콩 시위를 대하는 중국의 태도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중국은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유지한 채 G2 국가의 위상에 걸맞게 국민들을 성장시킬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에 뜻글자인 한자는 적지 않은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한자는 한글이나 영어처럼 디지털 입력이 편하지도 않다. 한자의 이 불편함이 역설이 되어 중국은 세계 최고의 음성인식 강국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지면... 반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다. 한글을 익히는데 그닥 높은 지적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른이든 아이든, 민이든 관이든, 마을이든 학교든 모두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과 범주로 문장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에 빠져 산다. 이른바 내가 최근에 주장하고 있는 쉬운 한글의 역설이다.

이러다간 글이 하염없이 이어질 것 같아 어설프게 결론을 내 보겠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교육은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을 만들어 내는 선발이 중심이 되는 교육이었다. 핀란드와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의 교육 선진국들은 그러한 교육이 가지고 있는 폐단을 일찌감치 깨닫고 다양한 물고기가 서로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맑고 깨끗한 개천을 만드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교육은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도 존재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선발되지 못한 개인 뿐만 아니라 선발된 개인도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행복이란 누군가의 상대적 불행 위에 존재할 구 있는 것이 아니다. 1명의 행복을 위해 99명이 불행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인간 사회가 아니라 약육강식에 기초한 동물의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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