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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시대 진단

아름다움을 대하는 세 가지 태도에 대하여...

by Back2Analog 2017. 10. 22.


코펜하겐의 매우 고풍스러운 호텔. 7시간 차이가 나는 시차에 반만 적응했는지 새벽 3시 즈음이면 꼭 눈이 떠진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 어제도 썼듯 난 인형처럼 생긴 덴마크의 아주 작은 아이들을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진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가 모두 나와 같을까? 나와 같은 취향의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그 또한 매우 행복한 일이지만, 세상에 나와 같은 취향의 인간들만 존재한다는 것은 인류의 진화와 확장성에 매우 치명적인 일이다. 비슷한 유전자 간의 결합이 인류의 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경험이 문화적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게 된 배경이 되었듯이….

암튼 새벽 3시(한국 시간 대략 오전 10시?)에 불현듯 '아름다움을 대하는 인간의 다양한 태도를 백설공주와 연결시켜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내 잠을 쫓아 버렸다. ㅠㅠ


첫 번째는 나와 같은 태도, 즉 관상을 통한 만족…. 이건 일곱 난쟁이의 유형이다. 만약 프로이트라면 그것은 욕망을 억압하면서 만들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할지도... (Shut up, Freud!)


두 번째는 소유를 통한 만족…. 아마 이런 유형이 가장 보편적이지 않을까? 백설공주나 백마 탄 왕자, 그리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 가장 보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인간은 이런 유형의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바로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의 유형이다. 이런 유형은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다우니?”

고백하자면, 딸들한테 매번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어보는 나도 사실은 이런 유형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유형 분류와 관련해서는 사실 다양한 해석과 접근이 가능하다. 

마지막을 동물적 본성, 첫 번째를 과거 근대 인류가 추구해 온 절대 이성이라고 본다면, 중간 유형은 그 둘 사이의 절묘한 결합이다. 우리가 흔히 접해 온 고전은 근대를 거치며 체계화되었다. 근대 인류는 절대이성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인종 말살이라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극은 극으로 통한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물성을 지나치게 억압한 나머지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 되었다. 아마 프로이트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근대의 극명한 선악 구도는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동물성마저도 악으로 규정한 결과일지도….

그러고 보면 첫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이 절합(articulation)되어 있는 내가 가장 위험한 유형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또 너무 걱정을 안 하는 것은 그러한 나의 위험성이 이 사회에 해를 끼칠 만큼 그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것? 


결론….

1. 혈액형만으로 인간의 성격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없듯, 위에 열거한 세 가지의 유형으로 마치 잘라져 있는 무처럼 인간의 유형을 나눌 수는 없다. 

2. 인간이 무엇을 나누고자 하는 행위는 자연의 규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분류’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절대 이성을 추구하던 시대에 인간은 분류된 결과에 선과 악이라는 주관적 가치를 개입시켰고, 그 결과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었다. 

3. 중요한 것은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분류된 결과이다. 나누는 행위에 방점을 찍게 되면 마치 과거의 나찌가 그랬던 것처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한 유형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최악까지는 아니지만 자신이 속해 있거나 또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특정한 유형의 잣대로 다른 유형을 재단하는 것 또한 언젠가 최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의하자. 성적 취향에 따라 인간을 ‘분류’할 수는 있어도, ‘분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