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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근대교육의 종말

전문직을 중심으로 한 '자격'과 '내용' 논쟁

by Back2Analog 2017. 12. 8.

예전부터 전문직을 둘러싼 '자격'과 '내용'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마침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사서직 전문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설문 의뢰가 들어와 그 답변으로 쓴 내용을 여기에 옮... 겨도 될까? 


1. 사서는 전문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류의 경험과 연구 결과를 종이에 기록해 동시대의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후대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가 인류의 역사시대를 열었습니다. 산업자본주의로 인해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산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서 그러한 정보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분류할 수 있는 전문영역이 필요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서’의 역할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사서를 전문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직은 전문가(professional)와 기술자(engineer)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서는 완벽한 전문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단순한 기술자도 아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사서를 둘러싼 전문성 논란입니다. 사서는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서를 바라보는 대중들은 사서를 기술자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전문가(professional)의 조건은 ① 사람을 다룬다. (기술자는 사람 이외의 것을 다루지요.) ② 조직에 기대지 않는다. (변호사는 사무실을 내고, 의사는 개인 병원을 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서는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조직 없이 전문직으로 존재할 수 없지요.) ③ 전문가를 선택하는 권리가 전문가가 아닌 소비자한테 있다. (변호사나 의사가 소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자신에 맞는 변호사나 의사를 선택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서는 물론, 교사도 완벽한 전문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서를 전문가로 칭하기에는 첫 번째 조건은 다소 애매하고, 두 번째는 확실히 아니지요. 교사의 경우 전문가의 조건 중 첫 번째만 충족...) 그렇기 때문에 사서나 교사는 전문가와 기술자 사이에 존재하는 semi professional?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전문성과 관련한 논란이 계속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사서가 그 역할이나 활동에 비해 사회적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보에 관리하고 분류하는 방법은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기능적 접근이고 두 번째는 정서적 접근입니다. 기능적 접근은 기술적으로 자료를 관리하고 분류할 수 있는 스킬이고, 정서적 접근은 정보를 대하는 철학입니다. 이 부분부터는 팩트가 아닌 저의 인식에 대한 서술입니다. 정보의 양이 갈수록 방대해지면서, 현대사회는 정보를 대하는 철학 보다는 정보를 다루는 스킬이 더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대학의 도서관 관련 학과 커리큘럼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정보를 대하는 철학이 사서 자격의 기준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자격’과 ‘내용’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논란은 사서뿐만 아니라 전문가와 기술자 사이에 위치해 있는 모든 전문영역에서 불거지고 있습니다. 논란의 핵심은 자신의 아성을 지키려고 하는 전문직들의 이해관계와 그 전문성이 사회의 성장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대체욕구입니다. 즉, 전문직은 자신의 자격을 자격이 부여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여된 목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결과가 되어 대중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러한 지극히 당연할 수 있는 전문직의 한계를 ‘보완’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대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격과 내용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양면을 적절히 보완해 사용하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양면이 가지고 있는 ‘입장’ 속에 흡수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장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3. 사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의 모든 체계는 사회의 필요성에서 출발하지만, 종국에서는 자신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한다.” (니클라스 루만) 

니클라스 루만의 이러한 지적은 공공사회학과 전문사회학이 가지고 있는 역학관계를 가장 명쾌하게 지적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사회의 성장이 분업화와 전문화를 이끌었습니다. 분업화된 개별 분야의 전문적인 성장이 필요로 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서가 처음부터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문성이 향하는 목표는 조금씩 망각이 되고, 전문성이라고 하는 체계에 갇히게 되면서 사회의 인정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마치 교육 전문가라고 하는 ‘장학사’의 현재 역할과는 무관하게 70년 대 장학사의 모습이 국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사서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관점에서 사서를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까지는 사서의 역할에 대한 자기서술만을 해 왔다면, 사서의 역할에 대한 외부서술을 경청하고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김무경 교수의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 공공사회학과 “전문적 사회학의 스트롱 프로그램”에 대한 체계이론적 비판을 중심으로“를 참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부적 관점(internal poing of view)”과 “외부적 관점(external point of view)”(Kieserling, 2004: 48)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서술 방식은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기능 분화의 결과다. 배타 분화된 근대사회의 각 부분 체계는 이중적 서술의 대상이 된다. 기능 체계의 소속원으로서 성찰이론은 내부적 관점에서, 무소속인 사회학은 외부적 관점에서 각 부분 체계를 관찰한다. 체계의 자기서술에서 나타나는 대상과 서술자(성찰이론)의 관계는, 루만이 표현한 바처럼, “충성과 긍정의 관계”다(Luhmann, 1997: 965). 자기서술은 “각 기능에 상응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회의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서술의 중요한 쓰임새는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능체계의 정당화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체계의 자기서술, 즉 교육의 성찰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 ‘모든’ 것이다. 다른 기능 체계의 자기서술과 마찬가지다. 자기서술에서 묘사되는 각 기능은 세상의 중심이자 대체 불가능한, 즉 비교 불가능한 사항임을 확인하며 모든 논의가 출발하는 동시에 종결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서술들은 서로 통합⦁화해 불가능하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중략>

교육이 엄정한 선발 과정을 통해 공인한 교육 자격의 다른 체계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들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Leistung),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