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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근대교육의 종말

'합의'와 '인정'의 거버넌스... 2018년 서울형혁신교육지구에 바람!

얼마 전, 둘째 딸이 저와 언쟁 중에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순간 전 딸의 버르장머리 없음에 화가 났습니다. “딸이 아빠한테 저래도 되는 거야?” 전 딸이 아빠에게 마땅히 지켜야 하는 예의의 기준을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만 했다면 바로 벌떡 일어나 딸을 야단쳤을텐데, 동시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난 딸이 가지고 있는 아빠의 기준에 부합하는 아빠일까?” 그러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제 옆지기가 둘째 딸을 야단치더군요.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상대방의 태도에 대한 판단은 나의 주관적 인식의 결과입니다. 때로는 믿었다가 발등을 찍히기도 하지만, 엉뚱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이러한 주관적 인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은 인간적 기준으로 합리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역할이 가지고 있는 신적 잣대를 들이대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죽하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민이나 관, 그리고 학은 각자가 입장이 가지고 있는 ‘상수’가 있습니다. 민의 상수는 ‘가치’일 것입니다. 관이 가지고 있는 상수는 ‘제도’겠지요. 학은 ‘교육적 잣대’라는 상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각의 상수를 둘러싼 변수가 있습니다. 민은 가치를 둘러싸고 있는 ‘자존감’, 관은 제도의 ‘해석’, 학은 ‘교육적 잣대’에 대한 사회적 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각각의 변수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상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칩니다. 시대적 과제인 가치를 망각한 자존감이 오히려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관이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만 제도를 해석한다면 시민들에게 공적 업무를 위임받은 그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교육적 잣대가 교육 전문가를 향하느냐, 이 사회의 성장을 향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변수입니다. 저는 거버넌스는 상대방의 상수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수를 둘러싸고 있는 변수와 변수가 만나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경험이 되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변화가 불가능해 보였던 각자의 상수도 비로소 애초에 그 상수가 시작되었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 분노를 넘어 서로를 혐오하거나, 갈등이 싫어 소통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진실과 무관한 각자의 주관적 인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험으로도 상대방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오랜 시간 동안 각자 다른 상수와 변수를 가지고 살아왔던 민관학은 오죽하겠습니까! 상대방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은 나의 주관적 인식의 결과입니다. 마치 중, 고등학교 시절 말로만 막연하게 장학사를 접했던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장학사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주관적 과거의 인식 안에 장학사를 가두어 두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제가 서울시교육청에 2년 2개월 14일 동안 있으면서 느꼈던 것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리저리 입장과 입장 사이를 떠돌며... 우리가 자신의 주관적 인식 안에 갇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오해를 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치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현재의 관은 예전처럼 민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심지어 학살까지 자행했던 그런 관이 아닙니다. 학은 자신의 교육 전문성을 이 시대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과 관과 학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은 사실 그 책임을 묻기 힘든 사회 구조의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어설픈 인간일 뿐입니다. 

제가 지난 2012년 은평에서 지역사회와 학교의 교육콘텐츠 연계를 제안했을 때 그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다른 아닌 제 옆지기였습니다. 그당시 제 옆지기는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낸 후 수요일 아침마다 저학년들 대상으로 동화 읽어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옆지기와 동네를 산책하는데 지나가는 많은 초등학생들이 제 옆지기에게 인사를 하더군요. 심지어 우리 아이와 같은 반이 아닌 초등학생들도... 만약 저에게 교육콘텐츠 연계 사업, 혁신교육지구, 그리고 마을방과후 활동이 지향해야 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수업이 끝나 학교 문을 열고 마을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반기는 것이 노란색 학원차가 아닌 마을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그렇게까지 허황되고 불가능한 상상일까요? 마을에 서로 알고 지내는 어른과 아이가 많아지는 것, 나아가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저 아이는 몇 학년이고 누구네 집 아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마을의 많은 어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굳이 학교 폭력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봉사를 계량화하지 않아도, 안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현실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김어준 총수(지금은 공장장인가요?)의 말처럼 질문이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질문을 바꾸어도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 답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래의 답은 현실의 '합의'된 상상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비록 합의할 수 없더라도 상대방이 처한 현실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합의'의 필요조건인 '인정'과 '인정'의 충분조건인 '합의'가 만나야 거버넌스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나무일까요, 아니면 숲일까요? 2013년 구로, 금천의 시범사업을 바탕으로, 2014년 11월 17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글로벌 교육혁신도시 서울 공동선언'을 통해 2015년 본격적으로 시작한 서울형혁신교육지구는 그동안 11개에서 22개로 확대되었고, 다양한 성장통을 겪어왔습니다. 주도와 참여를 둘러싼 민과 관의 갈등, 교육 원로와 중진 간의 존중과 인정의 갈등, 교육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교육 전문성을 둘러싼 갈등 등... 이러한 다양한 갈등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편의적으로 회피해 왔거나 혐오해 왔던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현재 이러한 다양한 갈등들이 모여 서울형혁신교육지구라는 숲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단지 나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내 앞에 있는 나무와 함께 멋진 숲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입장'이라고 하는 자신의 뿌리가 땅 속 깊숙히 박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숲의 전부라는 오만에 빠진다면 우리는 숲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 앞에 서 있는 나무도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정책의 중앙을 벗어나 하나의 지구에서 정책기획을 하고 있는 몸이지만, 한때 서울형혁신교육지구를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모쪼록 2018년 서울형혁신교육지구가 더욱 다양한 나무들을 품어 '더불어 숲'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7년 12월 15일, 서울형혁신교육지구라는 숲에서 자란 한 묘목 채희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