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겸손에 대하여...

교육의 겸손에 대하여

교육과잉시대의 창의인성교육 비판



1. 들어가며

인간은 유아기와 아동∙청소년기를 거치며 인류가 수천년 동안 이루어낸 진화와 문명화의  전과정을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함축적으로 학습해 낸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사는 다름아닌 자연일 것이다. 발전을 거듭해 온 과학문명의 관심이 인간이 발 딛고 있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향하고 있는 21세기에도 자연은 마치 교실에서 말썽을 부리고 싶어하는 초등학생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엄격한 교사처럼 여전히 인류에게 두려운 존재이다. 

자연의 일부에서 비롯된 인류가 자연에서 벗어나 첫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인류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어떠한 규칙도 읽어낼 수 없는 자연에게 신적 의미를 부여했다. 처음엔 경외 그 자체였던 자연의 거대한 섭리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인류는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러한 경험의 축적이 인간의 문화가 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하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관찰한 자연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예술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교사가 자연이고, 인류가 자연의 가르침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면, 인류의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라는 교육과정은 교사인 자연이 아닌, 학습자인 인간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인간은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교사인 자연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지만, 때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처럼 반항하기도 하였으며, 또 때로는 상대적으로 향상된 독립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학습자의 본분을 망각한 인간의 그러한 태도는 이따금씩 자연의 분노를 사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인류는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해 왔다.

그렇게 성장한 인류가 왜 인간의 내재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주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한때 토관과 신토(土官과 紳土)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영화, 사관과 신사(士官과 紳士)에서 교사라는 우월적 지위에 있던 하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에 의해 더 우월적 존재인 장교로 성장한 리처드 기어에게 거수경례로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교육을 교육 제공자의 입장이 아닌 학습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창의적인 성장 가능성에 경의를 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어찌보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 문제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주도해 온 인류의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학습의 모티브를 제공할 뿐인 교육 제공자의 주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교육의 주체는 학습자이고 교사는 지원자 또는 협력자일 뿐이라는 다분히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공식을 이제는 우리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때는 아닌지 제기해 본다. 


2. 창의인성교육이란?

약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냄이라는 언어적 정의를 가지고 있는 창의라는 단어의 개념 영역이 있다면, 적어도 인간이 특정하는 틀 안은 아닐 것이다. 현대의 교육이 체제 유지를 위한 사회화와 선별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제도화되었듯이[각주:1] 인류의 가장 큰 스승인 자연은 인류가 자신이 제시한 틀과 규칙 안에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규칙 속에서 진화한 인간은 자연이 제시한 틀과 규칙을 끊임없이 거스르는 창의적인 발상을 통해 현재의 문명을 이루어 냈다.


새는 알에서 나와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상을 깨뜨려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오른다. 이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이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


반면, 사람의 성품,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태도 및 행동 특성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는 인성이라는 단어의 개념적 위치는, 뭐라 콕 찝어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인간이 시대에 따라 특정하는 틀 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찌 보면 이렇게 상반된 두 개의 단어 조합으로 이루어진 창의인성이라는 말을 우리는 어디에 방점을 찍어서,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너무 강하고 분명하면, 그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과정에서 늘 새로운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 이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문제(사춘기, 중2병, 학교폭력, 왕따 등)는 모두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일반화되고 구조적으로 고착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를 강타했던 비틀즈 신드롬은 사실 시대 속에 잠재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특정한 경향의 대중을 세대(Generation)로 규정하면서 점화[각주:2]되었고, 그 영향력이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눈 앞에 보이는 물리적인 위협이 아니라, 몇몇 지식인들에 의해 때로는 다소 폭력적으로 규정되기도 하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입을 통해 동시대에 공유되고, 활자화 되어 대대로 전해지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언어의 정의'일지도 모르겠다.

창의인성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창의인성교육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는 교육적 목적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창의와 인성이라는 말의 부조화는 교육이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구조의 문제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인간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주의나 사상적 의도를 가지고 제공되었던 교육보다는 오히려 그 틀을 벗어나려고 했던 인간의 내재적 창의성에 의해  성장, 발전해 왔고, 창의인성교육을 시작하게된 계기가 만약 그 사실을 인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교육은 지금보다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3. 대한민국에서 소위 교육이란?

교육은 인류가 축적해 온 지혜를 배우는 것이기에 행복해야 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에 희망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행복과 희망이 아닌 늘 고통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기준도 없이 상대적으로 세워지는 줄 안에서 단 한 명의 승자 외엔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경쟁교육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육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고, 학부모들이 짊어져야 하는 사교육비의 부담은 급기야 세계 제일의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교육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불행한 현실과 희망 없는 미래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교육의 불행은 교육이 무엇이든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또는 해결해야 한다는 과한 기대로부터 비롯되었다. 현대교육의 근간이 된 근대교육은 봉건시대를 지켜왔던 핵심 축이었던 귀속지위를 무력화시키고,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정해져야 한다는 성취지위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 필요성이 확대되어 제도화되어왔다. 브르주아혁명을 이끌었던 당시의 중산층 시민계급이 자신의 능력으로 축적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수세기를 거치면서 마치 유전자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귀속지위를 부정하고, 지위(계급)는 인간 개개인의 성취를 통해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음을 주창하는 절박한 과정에서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렇게 제도화된 교육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귀속지위에 대한 반대가 단순한 반대에서 사회적 질서를 뒤흔드는 혁명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위 상승’ 따위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기층 민중들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르주아 계급은 교육이라는 제도를 자신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사용하는 동시에, 기층민들 또한 그 사다리에 자신들과 함께 오를 수 있음을 널리 홍보하며 혁명의 지지를 이끌어 냈을 것이다. 마치 조선을 건국하며 과거에 의해 선발된 관료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꿈꾸었던 정도전처럼….

하지만 제한된 사다리에 모든 사람이 오를 수는 없는 법, 양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음지를 동반할 수밖에 없듯, ‘성취’ 또한 태생적으로 ‘경쟁’이라는 이면이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혁명을 통해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건설한 초기 자본주의의 핵심 이념이 평등이 아닌 자유(경쟁)임은 그래서 매우 상징성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비롯된 사회주의의 핵심 이념인 ‘평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라는 단어 안에는 경쟁의 결과에 따른 구조적인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불평등한 경쟁을 뚫고 자신들의 지위까지 올라오는 개천 태생 용들을 지켜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고정된 계급의 틀을 깨는 저항의 무기였던 교육이 자본의 논리 안에서 성장을 거듭한 끝에 이제는 형식적 평등 뒤에 깊숙히 감추어 놓은 내용적 불평등이 광범위하게 작동하면서 어느새 브르주아혁명을 통해 등장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가장 확실한 억압의 망치가 되었다.

4. 그래서 창의인성교육은?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던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신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 행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두 가지의 사물을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즉  ‘Connect Things’이라고 이야기 했다. 잘 알다시피 우리에게 산소만큼이나 친숙해진 스마트폰(아이폰)은 mp3플레이어인 iPod에 음성통신 네트워크인 핸드폰을 결합시킨 창의적인 결과물이다. 마치 셜록 홈즈의 추리에 놀라다가 그 설명을 들은 후에 실망하는 의뢰인 처럼 지금에야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스티브잡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인터넷망이 연결되어 있는 사무실과 음성으로밖에 설명을 들을 수 없는 현장이 완벽히 분리된 현실 속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자본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경쟁에 의한 관계의 단절을 동반한다. 그리고 관계에 의해서 해소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소비를 통해 해소한다. 아니, 소비를 통해 무엇이든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불편하고 번잡스럽운 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성의 파괴는 그렇게 생산과 소비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어수룩하게 공황 따위에 흔들렸던 초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로 영리하게 발전해 오면서 어느덧 말기로 진입하게 되었고, 말기 자본주의 시대가 인간의 인성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자연(선사시대) - 인간(고대 그리스) - 신(중세) - 다시 인간(르네상스) - 자본(근, 현대)’[각주:3] 중심으로 나선형 성장을 거듭해 온 인간의 역사가 자본에 의해 파괴된 인간의 주도성을 다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자신을 부정하는 주의와 사상들을 영리하게 흡수하며 그 정체성을 유지시켜 왔지만, 그 과정 속에서 파괴된 인간성이 자본주의를 벼랑끝으로 몰아가고 있고,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제기 되는 것은 그래서 이해가 가능한 아이러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인성은 자본주의가 생산해 내는 그 어떤 것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창의성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 밖에서 지식과 지식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인성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관계와 관계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기때문에 창의인성교육의 핵심은 현실의 문제를 또다시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깨진 인간성과 파편화된 관계를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5. 글을 맺으며

IT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정보를 대중들이 공유하게 되면서 교육은 단순한 인간의 지식 수용성이 아닌 창의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성의 틀 밖에서 일어나는 창의성은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놓은 규범과 제도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창의성은 교육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각주:4]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창의인성교육은 창의적 인간에 대한 필요성과 동시에 창의적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규범외적 발칙함을 통제해야 하는 목적을 위해 제기되었을 수도 있다. 



한 때, 수 많은 폐인을 양산하고, 그들의 심장을 뚫어 버렸던 드라마 다모!  

종사관 황보윤은 채옥에게 모든 걸 다 버리고 같이 떠나자고 한다. 채옥은 자신은 '나으리와 섞일 수 없는 비천한 몸'이라며 거절한다. 그 때 했던 황보윤의 대사가 아직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내가 비천해지면 된다!"

내 주변엔 우리나라 청소년의 처지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올바른 교육(정책?)을 통해 그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럴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교육이 청소년들의 처지를 걱정한다면, 그리고 그런 청소년을 진정으로 구제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들이 처한 상황만큼 비천해질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의 권위? 

비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교육은 조금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교육에 대한 과한 기대가 교육의 과잉을 낳았고, 과잉 교육이 교육에 대한 과잉 권위로 이어졌다. 권위를 앞세우지만 않는다면 교육은 이 사회의 문제 해결과 성장에 제법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back2analog

  1. 뒤르켐(Durkheim)이 구조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교육의 본질 [본문으로]
  2. 한국에서 X세대가 서태지와 함께 등장했던 것처럼, 문화세대로서 10대의 등장을 이끈 것은 단연 비틀즈이다. [본문으로]
  3. 역사시대 이전, 세계는 ‘자연’이 지배하고 있었다. 자연에 속해 있으면서 자연을 숭배하던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 역사시대가 시작되었고, 이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가 인간에게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대 그리스는 많은 수학자와 철학자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주도성을 ‘신’(사실은 신을 앞세운 인간)에게 넘겨 주었고, 1,00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르네상스를 통해 다시 ‘인간’이 세상을 주도하게 되었다. 부패한 신의 대리 전쟁인 십자군 원정과 르네상스를 통해 발생한 도시국가의 중산층 시민들이 성장하여 브르주아 혁명을 일으켰고, 그렇게 등장한 자본주의에 의해 인간의 주도성은 다시 ‘자본’(사실은 자본을 앞세운 인간)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본문으로]
  4. 여기서 말하는 기득권 세력은 신세대를 늘 삐딱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성세대를 포함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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