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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근대교육의 종말

교육거버넌스를 위한 제언

by Back2Analog 2016. 7. 26.

교육거버넌스를 위한 제언


서울시교육청 채희태

    1. 들어가며

      100년을 계획하고 돌아보아야 할 교육정책을 거론함에 있어, 이제 겨우 다섯 살이 갓 넘거나 그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혁신교육지구의 성과와 한계를 논하는 것은 성급한 면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힘의 균형을 이루듯, 2010년 경기도에서 비롯되어 서울과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교육지구는 숨가쁜 경제 성장으로 인해 기울어진 대한민국 사회의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그리고 교육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인해 발생한 과잉과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 흔들리듯 혁신교육지구는 올바른 교육의 방향을 찾기 위해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혁신교육지구는 특정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교육 ‘사업’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구조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교육 ‘정책’이다. 사업의 성과는 목적하는 특정 수치의 변화나 눈에 보이는 건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정책의 성과는 제도와 시스템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불행하게도 정책이 삶을 바꾸고, 그렇게 바뀐 삶의 퇴적물들이 모여 시스템이 되고, 제도가 되는 경험을 하지 못하였다. 1953년 5월 10일 대한민국 법률 제286조로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적어도 1970년 11월 13일 이전까지는 법전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았는가!

      혁신교육지구를 통해 필자가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혁신교육지구의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민∙관∙학 거버넌스의 작동 원리이다. 민과 관과 학이 합의의 과정을 통해 내린 결정이라면 그 결정으로 인해 설사 잘못된 결과를 낳더라도 ‘합의’의 ‘과정’에서 생겨난 힘으로 그 잘못된 결과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혁신교육지구는 결과가 아닌 과정, 성과 그 자체 보다는 성과를 만들어가는 방법이 더 중요한 교육 정책이다. 지금까지 민과 관과 학은 오로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 왔으며, 민∙관∙학이 각자가 생각하는 교육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교육의 처참한 현실이다. 

      어쩌면 교육의 그 처참함이 우리의 발길을 붙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약 85년 후인 2100년에 현생 인류는 이 지구에서 아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나의 위치에서 내 일에 충실한 것이 인류를 종말로 이끄는 길이라면 우리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지도 모른 채 의미 없이 달려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질주를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다음 각자가 가고 있는 길의 의미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혁신교육지구는 목적을 가장한 수단일 뿐이고, 거버넌스야말로 수단을 빙자한 진정한 목적일지도 모른다. 

        2. 거버넌스의 이면

            1) 한국의 거버넌스, 그 태생적 한계

              몇 년 전에 프랑스와 독일에 주거재생 관련한 연수를 다녀 온 적이 있다. 7박 9일의 넉넉하지 않은 일정 동안 빡시게 프랑스의 사회적 기업과 독일의 친환경 재생 에너지 단지 등을 둘러보며, 왜 한국의 지도자들이 외국만 다녀오면 그 모습을 한국으로 ‘이식’해 오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이식을 통해 생겨난 나라다. 외세 열강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대한제국은 외세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한에는 자본주의가, 북한에는 사회주의가 이식되었다. 그리고 국민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이식된 제도뿐인 민주주의도….

              오랜 기간 동안 시장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국가와 일정정도 역할분담을 하면서 발전해 온 서구의 시민사회와 달리, 이식된 자본주의 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경제적인 요구 보다는 주로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해 등장하였다. 해방이후 남한을 통치하게 된 미군정은 당시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지식인들로 가득 찬 대한민국을 효과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 일제시대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는데, 이러한 관의 정체성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재야 지식인으로 구성된 시민사회는 관을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근육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이른바 발전국가론에서 설명하고 있듯,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독재정권의 강력한 시장 개척과 주도, 그리고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권력의 유지가 목적인 정치의 속성은 이윤의 확대가 목적인 시장의 원리와 달라서 경제 성장의 성과는 곧 독재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무기가 되었고, 독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편향성도 강화되었다.

              1987년 6∙10 항쟁을 거치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대부분의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그동안 치열하게 반독재 투쟁을 해왔던 정치적 성향이 강한 재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시장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비해 경제적 정체성을 지향하는 시민단체는 빈약했고, 마치 그러한 시대적 결핍을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 1989년 재야 시민사회의 개량주의 비판 속에 등장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지금 생각해 보면 제법 묵직한 시대적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1989년 경실련의 등장은 2012년 대선 패배 과정에서 등장한 녹색당과도 묘한 데자뷔가 느껴진다. 

              오랜 세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통해 마치 강철처럼 단련된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들은 1995년 재개된 지방자치 시대를 맞아 정치, 경제, 문화, 복지, 교육 등 다양한 영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고, 故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었던 국민의 정부와 故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거치며 질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했지만, 시민단체가 행정과 결합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2010년 6월, 민선5기 지방선거에 패기를 앞세운 젊은 자치단체장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지방자치는 새로운 도약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자치단체 간 선의의 정책 경쟁을 벌이며 행정에 실질적인 주민의 참여가 눈에 뜨이게 확대된 것이다. 주민참여예산제와 더불어 형식에 그쳤던 민과 관의 거버넌스가 내용적으로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으며,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변호사가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 당선되면서 바야흐로 거버넌스는 본격적인 승천을 위한 마지막 점을 찍게 되었다.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 안에서 이견은 투쟁이 아닌 타협의 대상이었다. 이견을 가진 사람은 죽어 없어져야 할 존재가 아닌 시장의 확대를 위해 꼭 필요한 잠재적 소비자였을 것이고, 또한 이견은 거칠게 존재하던 시장의 논리에 섬세함을 더해 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 ‘이견’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반면 정치 논리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이견과 이견 사이의 대립과 투쟁만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에서 거버넌스는 해방 이후 전통적으로 민을 관리하고 통제해 온 관과,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관에 저항하거나 또는 견제하고 비판해온 민이 만나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버넌스는 민과 관에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서로가 서로를 협력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다. 거버넌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성장에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반대로 각각의 진영이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서로를 괴롭게 만드는 골칫덩이가 될 수도 있다. 


                2) 갈등의 긍정적 쓸모

                  얼마 전 종편 드라마는 보지 않겠다는 마눌님 눈을 피해 드라마 ‘송곳’을 봤다. 육사 출신에 평범하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주인공 이수인 과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직원들을 내보내라는 회사의 부당해고 지시에 맞서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부진노동상담소의 고구신 소장은 그런 이수인을 지원한다. 노동조합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이수인이 노무사 고구신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노동조합에 대해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본사 노조 위원장과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부진노동상담소의 죽순이 문소진(김가은 분)은 그 모습을 보고 ‘노조원 끼리 사우는 걸 보니 초급반 떼고 중급반으로 올려도 되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만나는 낯 선 사람의 옷차림이나 태도, 심지어 악행까지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관계 속에서 갈등이 일어난다는 건 적어도 낯 선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늘 ‘갈등’을 부정적인 요소로만 인식해 왔다. 분단이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지배자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뒤범벅이 되어 갈등은 사회의 안정을 파괴하는 무서운 것이라고 배웠고, 또 갈등은 사회적 안정을 파괴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논쟁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고, 만나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자칫 다른 사람들 눈에 ‘갈등’으로 비춰질 것이 두려워….

                  한 쪽 면만 있는 동전이 있을 수 없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중 한 쪽 면만을 바라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는 건 또 다른 능력에 속한다. 우리가 부정적으로만 인식해 온 ‘갈등’도 그러하다. 눈에 보이는 갈등은 부정적으로 인식이 되지만 사실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긍정성이 있다. 만나지 않는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갈등도 없다. 갈등은 만남과 이해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두려워서, 갈등 없이 거버넌스를 하겠다는 말은 거버넌스를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만약 내가 하고 있는 거버넌스의 대상이 갈등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 대상은 거버넌스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갈등이 무조건 좋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저 갈등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쓸모도 함께 보아 주자는 말이다. 갈등이 보다 나은 결정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거버넌스의 초급 단계를 벗어난 것이다. 


                    3) 거버넌스를 방해하는 민과 관의 3요소

                      일반적으로 민∙관 거버넌스를 하는 과정에서 민과 관은 서로에게 답답함과 답답함을 넘어선 불만을 표출한다. 민은 관에게 영혼이 없는 조직이라고 하고, 관은 민에게 무책임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아직 우리는 거버넌스의 초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버넌스 중급 과정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바로 상대방의 부정성 이면에 숨어 있는 긍정성을 찾아 이해하는 것이다.

                      먼저 거버넌스를 방해하는 관의 3요소를 살펴보자. 민은 거버넌스 파트너인 관의 칸막이, 순환보직, 그리고 지나친 경직성을 비판한다. 과연 민의 지적대로 칸막이, 순환보직, 경직성에 부정적인 면만 있을까? 칸막이는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지켜야 하는 책임과 권한의 선이다. 그 선을 넘는 것을 다른 말로 월권이라고 한다. 근현대사를 거치는 사이 공무원의 월권은 시민사회의 견제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바로 칸막이다. 칸막이가 불편하게 작용하는 지점도 없지 않으나 결정된 정책을 추진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다. 칸막이가 불편해서 칸막이를 없앤다면 우리는 또다른 모순을 접하게 될 것이다. 칸막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 개의 칸막이 위에 거버넌스 방식의 콘트롤 타워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책의 논의와 결정은 칸막이 위에서 하고, 그렇게 결정된 정책의 추진이 칸막이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칸막이는 거버넌스의 방해 요소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추진 동력이 될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순환보직은 과거 한곳에 오래 고여 있으면서 부패했던 행정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행정 밖에서 먼저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순환보직이 이제는 행정의 전문성을 약화시켜 거버넌스를 방해하고 있다. 순환보직제도는 격무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탈출구이자 승진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순환보직의 문제는 전문성이 있는 개방형 인사제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서울시의 자치구청 중 구로, 관악, 금천, 도봉, 동작, 양천 등에서는 교육을 전담하는 교육정책보좌관을 외부에서 채용해 그 효과를 톡톡이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의 지나친 경직성은 태생적 한계인 동시에 관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 경직성의 한계를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바로 민∙관 거버넌스를 하는 것이다. 즉 관의 지나친 경직성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사회를 통한 보완의 대상이다.

                      다음으로 거버넌스를 방해하는 민의 3요소를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다. 주로 정치적 정체성으로 관을 비판, 견제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관이 주목하지 않는 가치를 위해 노력해 왔다. 비록 경제적 성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나마 이정도의 민주적 질서 안에서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것은 가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해 왔던 시민사회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관에 입장에서 보면 늘 자신을 비판하고 견제해 온 민 또한 달갑기만 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관은 민의 지나친 가치 지향성, 진영논리, 유연성을 비판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며 성장해 온 민에게 ‘가치’는 공무원이 생각하는 ‘승진’과 다르지 않다. 가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간혹 민을 자기 진영에게만 관대하고 자기 밖의 진영에게는 지나치게 철저한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민이나 관이나 모두 거버넌스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모습 이면에 있는 긍정적 쓸모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서로가 불편해 하고 있는 민과 관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결과의 책임은 당사자의 몫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원인에 대한 구조적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소 논점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예전엔 관계를 통해서만 해소할 수 있었던 많은 요구들을 이제는 대부분 시장에서 소비를 통해 해소한다. 감정노동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해 감정사회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미국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나를 빌려 드립니다』라는 책에서 말기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까지 시장에 의지하고 있는지 고발하고 있다. 돈만 있으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물질이 아닌 감정까지도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인간이 시장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시장이 인간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민과 관이 서로 만나 관계를 맺고, 불편한 점들을 기꺼이 감수하며, 협력을 통해 이 사회가 원하는 성과를 내는 것이 거버넌스인데, 관계가 아닌 소비에 익숙해진 인간이 소비가 아닌 관계를 위해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일을 하려니 참으로 고약한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교육거버넌스

                          지난 2014년 11월 17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글로벌 교육혁신도시 서울 선언’을 통해 서울시와 교육청이 4대 과제 20개 협력사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일반자치와 교육자치가 정면 충돌하고 있는 경남이나, 서로 최소한의 업무 협의 수준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경기도에 비하면 서울은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의 협업적 분업, 분업적 협업을 모범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와 교육청을 이끄는 두 수장의 의지와는 별개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담당자의 입에서는 서로의 협력 태도에 불만을 토로하는 볼멘 소리가 자주 나오곤 한다. 일반행정을 대표하는 서울시는 건설, 교통, 문화, 복지, 교육 등 그 관심사가 교육청에 비해 넓은 대신에 교육에 대한 얕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재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되어 있는 과장, 팀장, 주무관은 교육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보직을 순환하며 돌다가 우연히 그 자리에 앉게 된 것 뿐이다. 반면 오로지 교육행정만을 해 온 교육청은 교육이라는 좁은 영역에 대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는 넓이의 관점에서 교육청을 비판하고, 교육청은 서울시의 교육에 대한 얄팍한 이해관계에 대해 불만이 높다. 만약에 서울시가 교육청을 통해 깊이를 보완하고, 교육청은 서울시를 통해 넓이를 보완한다면 서울시장과 서울시교육감이 공동선언을 통해 추진하고 있는 서울시와 교육청의 관∙관 거버넌스는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1) 서울형혁신교육지구

                              서울형혁신교육지구는 서울시장과 서울시교육감의 공동선언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협력사업 중 하나이다. 혁신교육지구 앞에 ‘서울형’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붙인 이유는 경기도나 다른 시∙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혁신교육지구와는 다르게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의 전면적인 협력을 통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구로와 금천에서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혁신교육지구는 2014년에는 문용린 교육감의 반대로 교육청이 아닌 서울시에 의해 교육우선지구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2015년 마침내  서울시장과 서울시교육감의 공동선언에 이은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의 전면적인 협력의 힘으로 11개 자치구를 공모 지정하며 서울형혁신교육지구로 거듭나게 된다.  

                               서울형혁신교육지구별 사업은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이 제시한 4개의 필수과제와 지역별 특화사업으로 구성되는데, 4개의 필수과제는 ‘학급당 학생 수 25명 이하 감축 사업’, ‘일반고 진로, 직업 지원 사업’, ‘민∙관 거버넌스 구축 지원 사업’, 마지막으로 ‘마을∙학교 방과후 연계 지원 사업’이다. 이 중 ‘학급당 학생 수 25명 이하 감축 사업’과 ‘일반고 진로, 직업 지원 사업’은 2016년 확대 과정에서 각각 ‘학교교육지원 사업’과 ‘청소년 자치 및 동아리 활성화 지원 사업’으로 대체되는데, ‘학급당 학생 수 25명 이하 감축 사업’과 ‘일반고 진로, 직업 지원 사업’에 대해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입장의 차이가 다소 있고,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는 결이 다른 지점이 있기에 ‘마을∙학교 방과후 지원 사업’과 ‘민∙관 거버넌스 구축 지원 사업’에 대해서만 좀 더 들여다 보고자 한다. 또한 ‘마을∙학교 방과후 지원 사업’은 ‘방과후’로 그 내용을 제한하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마을학교’로 접근하는 것이 교육거버넌스를 이해하는데 더 유용할 것이다.


                                2) 마을학교, 마을결합형학교, 마을과 학교 상생 프로젝트

                                  마을학교는 마을이라는 단어와 학교라는 단어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조어이다. 일반적으로 단어와 단어, 개념과 개념이 결합해 만들어지는 조어를 보면 그 사회의 결핍을 읽어낼 수 있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기업은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 기능과 목적이 있다고 배웠다. 대한민국의 재벌 기업이 자신이 벌어들이는 이윤과 균형을 이룰만큼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결핍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이미 그 목적에 포함되어 있고, 포함되어야 할 ‘사회적’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기업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은 엄격히 말하면 역前앞, 돼지足발 같은 형용을 통한 동어반복이다. 

                                  프랑스에서는 만화를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영화, 사진에 이어 제9의 예술로 정의한다. 반면 한국에서 만화는 언젠가부터 나이 어린 애들이나 히히덕 거리면 보는 매우 저급하고 불량한 매체로 인식되어 왔다. 해서 만화의 저급함과 불량함을 희석시키기 위해 등장한 조어가 바로 ‘학습만화’이다. 우리는 현재 만화를 웹툰으로 가장 많이 소비하고 있고, 나아가 웹툰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성장하고 있다. 웹툰이 이렇게까지 발전한 배경에는 저급만화, 불량만화의 편견을 깨고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 정서적 브릿지가 되어준 학습만화가 있었다. 학습 내용을 만화에 실어 전달하기 위해서는 채색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학습 동기의 호흡이 짧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짧은 출판 주기가 생명과도 같았다. 이는 독창적인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웹툰 성공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마을과 학교가 모두 온전하게 자기 기능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마을학교라는 조어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을은 공동체가 파괴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각박해 지고 있고, 그렇게 마을이 마을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마을이 하던 모든 기능을 학교가 떠맡게 되었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부모와 자녀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던 소위 밥상머리교육, 마을에서 친구, 형, 동생들과 함께 어우러져 뛰어 놀고, 싸우는 과정에서 몸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깨달았던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은 공교육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성질의 또 다른 교육이었다.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사라지면서 아이들의 정서적 구멍은 커져만 갔고, 그만큼 공교육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도 함께 커졌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조어들처럼 마을학교라는 조어 안에도 마을과 학교의 결핍이 들어 있다. 마을학교는 마을의 교육이 학교 교육을 대체해야 한다는 발칙함이나, 학교 교육을 위해 마을이 희생해야 한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마을의 성장이 학교를 지원하고, 학교가 마을의 성장동력이 되는 마을과 학교의 거버넌스를 지향해야 한다. 마을학교는 마을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학교가 마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자원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래서 마을학교라는 조어 안에는 마을의 희망과 학교의 바람이 포함되어 있다. 마을에서 교육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를 복원하고 교육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을학교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현재 서울시교육청은 마을학교의 교육청 버전인 ‘마을결합형학교’ 사업을, 서울시는 마을공동체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학교의 서울시 버전인 ‘마을과 학교 상생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추상적 희망과 막연한 바람이었던 마을학교가 마을에서 학교로 다가가는 마을과 학교 상생프로젝트를 통해, 그리고 학교에서 마을을 향하고 있는 마을결합형학교를 통해 구체화 되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마을과 학교 가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서 마을교육생태계라는 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3) 민∙관∙학 교육거버넌스

                                      2015년 서울형혁신교육지구의 필수 과제 중 하나였던 ‘민∙관 거버넌스 구축 지원 사업’은 사업이 진행되는 사이 자연스럽게 ‘민∙관∙학 거버넌스 구축 지원 사업’으로 그 개념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것이 서울형혁신교육지구의 성과인지, 서울형혁신교육지구가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니 ‘학’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지의 결과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게 어떤 것이든 위에 구구절절이 열거한 민∙관 거버넌스의 논리가 민∙관∙학 교육거버넌스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교육’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교육을 주도하고 있는 교육 ‘주체’의 생각과 교육의 결과가 만들어 놓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육 ‘객체’의 생각의 차이가 어쩌면 민과 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보다도 훨씬 더 크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민과 관과 학이 생각하는 교육의 모습을 만약 도형으로 표현한다면, 위 그림처럼 되지 않을까? 학은 과잉된 교육에 대한 기대로 인해 교육을 완전무결한 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일반적으로 관은 교육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무시한 채 교육을 밋밋하고 단순한 평면으로 인식한다. 교육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이 생각하는 교육의 모습은 울퉁불퉁하고 그 정확한 형체가 없다. 장님이 자신이 만진 부분을 일반화시켜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하듯, 교육거버넌스의 당사자인 민과 관과 학은 각자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있는 교육의 모습을 우리사회의 ‘보편적’ 교육의 모습이라고 인식하고 있지는 않을까? 

                                      교육거버넌스가 내 딛어야 할 첫걸음은 지금까지 교육을 바라보고 있었던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벗어나 민과 관과 학이 함께 느끼고 있는 교육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그 모습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어야 한다.


                                        4. 小結

                                          결과가 만족스럽다 하더라도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그 만족은 더 단단한 사회적 모순이 되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낸 성과 또한 마찬가지다. 눈 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면 사회는 저절로 성장할 거라는 헛된 상상은 하루 빨리 폐기해야 할 구시대적 발상이다. 반대로 만약 이 사회가 인류가 바라는 보편적 가치에 합의하고 그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사회가 성장한다면 현재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은 하나, 둘 해결될 것이다. 

                                          미국의 IT 1세대를 이끌었던 IBM은 한낱 소프트웨어 개발사였던 Microsoft에 의해 2진으로 후퇴한다. 한때 전 세계 컴퓨터의 OS를 장악한 Microsoft였지만, 검색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 Google에 의해 서너발짝 뒤로 밀려났다. 현재 모바일시대를 이끌고 있는 IT 주도 기업은 단연 Apple이다. 한국은 또 어떤가! 밀레니엄 시대 다음은 한메일을 앞세워 대한민국 인터넷 시장을 선점했지만, 2005년 즈음 집단지성이라는 인해전술을 앞세운 네이버의 지식인에 의해 1인자 자리를 양보하고 절치부심하다 결국 스마트폰 시대의 새로운 플랫폼 강자로 등장한 카카오에 의해 그 찬란했던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유연해야 할 대한민국 시민사회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집스럽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마치 조선시대 꽉 막힌 유생을 닮았다.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정치의 격변 시대를 관통하며 때로는 정부와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때로는 대중들의 응어리를 풀어 주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이 사회의 진보를 막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보일까, 아닐까? 때로는 이 사회가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잡을 때, 자기 혼자라도 바른 길을 가고 싶겠지만, 그 결과가 오히려 이 사회 안의 인식의 간극만 넓히는 것이라면? 그래서 결국 사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면?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거버넌스를 하고자 한다면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성장은 이상의 관점에서 현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현실은 주관이 난무한 열정이다. 뜨거운 열정과 더불어 냉철하게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태도는 거버넌스 시대에 민과 관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 중 하나이다. 만약 민과 관이 거버넌스 시대를 맞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편향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니 않는다면, 시대의 흐름에 대비하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IT 기업처럼, 깃발만 나부끼는 민과 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