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장, 반반(反半)전문가의 전문성 비판

변명으로 시작한다. 교육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사실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가끔 나를 특정한 영역의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때마다 난 전문가라는 명칭으로 날 불러주지 말 것을 요청하곤 한다. 수없이 많은 전문성이 난무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그 어떤 전문성도 이 사회의 보편적 성장을 위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불친절한 전문성에 대한 견해를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한번은 학교 밖 청소년들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한 공공기관에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렇듯 운영위원 앞에서 자신들의 전문성과 그 노력을 한껏 뽐내고 싶었으리라. 자신들은 작년엔 몇 명의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났고, 올해에는 더 많은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발표를 들으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기관이 점점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계속 더 불행해져야 하나요?” 


그 기관을 비난하고자 든 비유가 아니다. 그 기관의 대표는 매우 헌신적이며, 서울시에서 이동 쉼터를 위탁받은 그 기관 또한 누구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한껏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전문성이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성실하게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은 것이다.

전문성을 비판하기 위해 끌어올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분야는 역시 정치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음모 집단의 내부 고발자, 윤태호 원작의 영화 '내부자들'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우장훈 검사(조승우)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이 사건에 유력한 대선주자인 장필우(이경영)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주간인 이강희(백윤식)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장훈 검사는 이들에서 배신을 당한 조폭 안상구(이병헌)가 비자금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폴리페서로 국회의원이 된 대학 은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우장훈 검사 : 교수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폴리페서 : 뭐가?
우장훈 검사 : 걱정이 좀 돼서요. 교수님 같으신 분이 이런 정치판에 계신다는 게 좀...
폴리페서 : 내가 처음 여의도에 들어올 때, 누군가 나한테 그러더라구. 여당, 즉 집권당이 되는 거 외에 국회의원이 정치적으로 지향할 것은 없다. 정치란 큰 의미로 생존! 국가의 생존, 국민의 생존, 그리고 나의 생존이다. 하하….


소위 정치의 전문성이 지향하는 바가 과연 국가와 국민의 생존일까? 정치인에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보다 더 중요할까?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치’의 개념과, 현재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어 존재하고 있는 ‘정치’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치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전문적 보편성이라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정치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각국 정부가 다음 선거보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드문 상황”[각주:1]이라는 표현으로 인류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는 전문화된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치의 전문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현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 외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우리나라에서 정치만큼 손쉽게 비판할 수 있는 분야도 흔치는 않다. 오해를 막기 위해 장의 제목을 상기하자. “반반(反半)전문가의 전문성 비판”. 난 정치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으로서 정치를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혐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보편적 정치의 개념을 되찾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참여로 전문성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정치를 구출하자는 의미가 강하다. 이미 다른 전문성에 빠져있어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정치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답이다. 


전문성의 시작

인류의 전문성은 조상인 사피엔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특징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전문성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전문성의 시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나는 근대의 위대한 통찰자인 맑스의 어깨 위에 살짝 올라타고자 한다. 맑스는 근대 인류에게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과 ‘계급’이다. 맑스 이전의 노동은 피지배 계급이나 하는 천한 행위였다.[각주:2] 하지만 맑스는 그 천한 행동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노동의 가치는 신성한 것이 되었고, 그러한 인식의 확대는 맑스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본가에게도 득이 되었다. 노동을 신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노동을 강요할 수 있었겠는가! 산업 자본주의가 복잡해질수록 노동 또한 신성하게 ‘분화’되었다. 노동의 분화와 전문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맑스를 소환했다고 해서 전문성이 맑스의 시대적 활동 무대였던 근대에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문성이 자본주의와 만나 꽃을 피운 것은 맞지만, 그 시작은 맑스가 제안한 또 다른 관점인 ‘계급’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맑스는, 그리고 엥겔스는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서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당사자, 인류의 역사 어느 시기에 지배를 전문적으로 하는 지배계급과 지배를 전문적으로 받는 피지배계급이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계급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전문성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로 나뉘었던 계급이 본격적으로 전문성의 분화를 추동한다. 피지배계급의 전문성이 효율적인 생산 노동을 위해 분화했다면, 지배계급의 전문성은 보다 세련되게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분화하였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자.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이유는 청동기가 생산 노동에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물을 살펴보자. 제정이 일치된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며 피지배계급 앞에서 청동쌍령구를 흔들었을 것이다. 또한 피지배계급이 노동을 하다 말고 청동 거울을 꺼내 노동에 찌든 자신의 얼굴을 살폈을 리 만무하다. 



계급사회 이후 다양한 전문성이 노동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왔다. 우리가 노동과 다소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단어인 예술, 즉 ‘art’의 라틴어 어원은 ‘ars(아르스)’이다. ars는 그리스어 ‘techne(테크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예술의 어원인 techne가 예술을 의미하는 art와 기술을 의미하는 technic으로 분화하기 전, techne는 노동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구를 다듬는 기술을 가리키는 단어였을 것이다. 그러한 techne가 계급사회 이후 노동과 분리되어 지배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문성인 ‘art’와 여전히 노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전문성인 ‘technic’으로 분화한 것이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제18대 파라오인 투탄카멘의 얼굴을 황금으로 만든 장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장인은 라오콘 군상의 일그러진 표정을 통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각주:3]를 담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계급사회에서 예술과 문화가 지배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예술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노동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비로소 전문적이고 독자적인 성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예술이 여전히 노동의 이면으로 존재했었다면, 그 빛나는 성취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은 중세에 접어들어 완벽한 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정교해졌고, 그 정교함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는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민 계급의 지원을 받아 꽃을 피웠다. 메디치 가문의 지원이 없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나 ‘다비드’ 같은 작품을 창작할 시간에 농사를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모차르트에게 거액의 작곡비를 지불한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의 이름으로 초연되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문화를 뜻하는 영단어 ‘culture’는 ‘경작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 ‘cultura’가 그 어원이다. 문화는 인류의 직접적 생존 방식이었던 노동(경작) 행위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미 산업사회 훨씬 이전부터 그 본질인 노동과는 무관하게 성장해 왔다. 문화는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억압의 망치 역할을 세련되게 수행해 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계급사회에서 지배와 불평등을 당연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문화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브르디외가 제2의 본성으로 규정한 아비투스, 즉 계급은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인식되었기에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문화와 힘겨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 모든 사회 체계들이 그러하겠지만, 무형, 무색, 무취로 존재하는 문화야말로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시대를 ‘유지’하거나 피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자 도구이다.


전문성의 시대와 전문성의 역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전문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성을 직업으로 치환해 보면 이해가 쉽다. 별의별 고급스런 직업부터 하찮아 보이는 직업까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직업의 수가 그나마 인류의 숫자만큼 분화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오래전에 공연기획을 하는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Beatles와 Led Zeppelin, Queen과 Nirvana의 계보를 잇는 록 그룹 중, Metalica라는 그룹이 있다. 록 음악에 관심이 없는 분은 지금부터 하는 얘기에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잠시 이해를 접어두고 전문성의 과잉이 얼마나 우리를 전문성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실감해 보는 것도 필자의 의도 중 하나이다. 

록 음악이 전문성으로 분화되기 전 Beatles의 음악은 그냥 Rock’n Roll이었다. 시끄럽게 괴성을 질러대는 “I wanna hold your hand”도, 멋진 첼로 연주가 더해진 “Yesterday”도 Bealtes의 음악은 모두 Rock’n Roll로 분류한다. Beatles 해체 즈음 결성되어 1970년대를 풍미했던 록 그룹 Led Zeppenlin의 음악은 Rock’n Roll 중에서도 Heavy Metal, 또는 Hard Rock으로 분류한다. 얼마 전 Bohemian Rhapsody라는 영화를 통해 화려하게 귀환한 Queen은 다양한 멤버의 취향[각주:4]이 결합된 록 그룹이라 딱히 장르를 특정하긴 어렵지만, 멤버들에게 떼창을 강요하고, 테이프가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오버 더블링을 했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추구했던 음악은 Opera Rock 쯤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의 논리에 반하는 음악을 추구하다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이끌었던 Nirvana는 Alternative Rock으로, 돌고 돌아 처음에 소개하려고 했던 Metalica는 Rock의 한 분류인 Heavy Metal 중에서도 Thrash Metal로 분류한다. 

Metalica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내한하여 공연을 한 바 있다. Metalica 정도 되는 그룹이 공연을 다니면 멤버들만 이동하지 않는다. 그룹에 최적화된 음향 장비와 음향 전문가들도 함께 공연을 따라 다닌다. 마이클 잭슨이 한 번 공연을 다니면 비행기 세 대가 함께 움직인다는 다소 과장 섞인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어쨌든,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를 설치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 중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공연장 바닥에 열심히 야광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Melalica 공연을 유치한 한국 담당자가 그 사람한테 뭐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멤버들이 대기석에서 무대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바닥에 야광 테이프를 전문적으로 붙이는 사람이다.”




바닥에 야광 테이프를 붙이기 위해 Metalica를 따라다니는 그 전문가의 전문성을 하찮다고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문성의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별의별 전문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든 예일 뿐이다. 하지만, 전문성이 시대를 관통하며 전문성이 수평적 역할로만 분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문성은 수평적 역할이 아닌 수직적 권력으로 분화했다. 애초에 최초의 전문성이 지배와 피지배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쩌면 수직적 권력관계로의 분화가 전문성의 분화가 의도한 애초의 목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성 이면에 존재하는 첫 번째 역설이다. 즉, 전문성의 분화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전문성과 전문성을 수평적 역할 관계가 아닌, 수직적 권력 관계로 분화시킨다. 

전문성의 두 번째 역설은 무엇일까? 사회가 복잡해지며 우리는 한 사람이 어설프게 감당했던 모든 일을 잘게 쪼갠 후 다양한 전문가에게 위임한다. 교육은 교사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 법은 판, 검사와 변호사에게, 행정은 관료에게,.. 단순히 역할과 권한만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역할과 권한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전문가가 져야 하는 책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설픔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문가에게 마치 신에 준하는 역할과 책임을 요구한다. 하지만 교사도, 정치인도, 판사도, 공무원도 나와 다르지 않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모두’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인간인 동시에 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그 역할을, 권한을, 역할과 권한에 따른 책임을 전가해 왔다. 한낱 인간인 전문가가 신에 준하는 책임의 요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 있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전문성 안에 숨는 것이다. 그래서 숙련된 전문가는 절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배가 침몰하고, 그 안에서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가도, 배를 띄워 그 아이들을 구조해야 할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소용이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전문가라면 누구난 한 번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의 책임을 넘어서는 오지랖을 발휘해 보려는 시도를 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전문가 선배로부터 이런 충고를 듣지 않았을까? 


“그 사람을 구해주고 나면, 그 사람이 요구하는 보따리도 줘야 하는데, 책임질 수 있겠어?”


우리가 전문성에 과도한 책임을 물은 결과 전문성과 전문성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을 메울 전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성의 두 번째 역설은 이 시대 모든 책임은 신이 아닌 인간 전문가에게 전가되지만, 인간 전문가는 절대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성의 첫 번째, 두 번째 역설은 전문성의 세 번째 역설로 이어진다. 특정 분야에 대해 역할과 권한, 그리고 부담스런 책임까지 위임받은 ‘인간’ 전문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이 곧 자신의 밥그릇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비전문가인 시민들은 대체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만약 시민이 상식에 기초해 전문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다. 그 전문성의 분야가 정치든, 경제든, 그리고 교육이든… 


교육이 엄정한 선발 과정을 통해 공인한 교육 자격을 다른 체계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들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각주:5]


전문성에 위임된 ‘역할’과 그 권한에 따라 전가된 ‘책임’, 그리고 역할과 책임에 따른 ‘밥그릇’의 크기는 전문성을 구성하는 3요소이다. 전문성은 생산성 확대를 위한 노동 분화의 결과이고, 그 분화된 최초의 전문성이 계급이다 보니 그런 요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전문성의 분화, 그리고 분화된 전문성 안에서 수없이 많은 전문성들이 각개약진을 한 결과 마침내 인류는 생존을 위한 충분한 크기의 파이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를 계속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선해 보이는 의도’는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전문성을 부여하고 인정해 준 시민과 시대의 상식에 반하는 ‘악한 결과’로 이어진다. 전문성의 세 번째 역설은 전문가는 전문성의 시대 안에서 그저 전문성의 밥그릇을 지키는 이해당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책 결정 권한을 이해당사자인 전문가에게 쥐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전문성의 3요소에 대해서는 2부와 3부에서 보다 구체적인 예와 함께 다루어 보겠다.

마지막으로 전문성의 네 번째 역설에 대해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복잡하게 분화된 전문성으로 인해 시대를 관통하는 상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잘게 쪼개진 전문성의 상식만이 존재한다. 민과 관의 상식이 다르고, 마을과 학교의 상식이 다르고, 진보와 보수의 상식이 다르다. 근대 초기 맑스는 자본을 가지지 않은 무산자 계급인 노동자에게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으로 자본가계급과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 소위 노동자의 당파성은 귀족 노조 노동자의 당파성과, 공무원 노조 노동자의 당파성과, 정규직 노조 노동자의 당파성과, 그리고 노조라는 틀로 묶이는 것이 쉽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당파성으로 쪼개져 각각의 입장만을 대변할 뿐이다. 서로가 상식을 주장하되 시대를 아우르는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 그리하여 서로 다른 상식과 상식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갈등하고 투쟁하는 시대가 된 것은 전문성의 과잉이 만든 도착(倒錯)적 결과이다. 

필자는 전문성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농경사회 이후 분화된 전문성은 경제적으로 생산력의 확대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관료제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리해 복잡한 인간사회를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영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 또한 앞에서도 밝혔듯 인류가 계급의 전문성으로 분화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빛나는 문명의 성취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컵에 반쯤 차 있는 물을 보고도 ‘반이나’ 또는 ‘반밖에’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듯, 긍정성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측면, 또는 부정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살피는 것은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긍정성이 과하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고, 과잉된 부정성은 역설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와 맹자가 과유불급과 중용을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전문성의 긍정성

관점

전문성의 부정성

생산력 확대

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사회의 효율적 운영

제도적

책임의 분리와 전가

전문가의 책임성 강화

정책적

전문성이 사적 이해관계로 작동

문명의 발달

문화적

상식의 분화와 파괴



지금까지 전문성에 반(反)하는 반(半) 전문가의 관점으로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살폈다. 전문성에 대해 더 전문적으로 파헤치고 싶은 마음 없지 않으나, 그렇게 되면 필자 또한 지금까지 비판한 전문성의 역설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 온 교육에 대해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육에 대한 질문도 답도 모두 교육 전문가의 몫이었다. 독자도 필자도 아쉬울 수 있으나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고, 다시 교육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고자 한다. 필자는 교육에 대해 엉뚱한 질문을 던지다가 언제든 지금처럼 삼천포에 들를 것이다.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교육 문제에 대한 답은 교육의 전문성이라는 울타리 안이 아니라, 어쩌면 엉뚱한 삼천포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문성에 대해 필자보다 먼저, 이 장황하고도 촌스러운 문장의 비논리적 나열이 아닌, 촌철살인의 시로 비판한 이가 있다. 바로 페이스북에 주로 활동하며 빼어난 시와 더 빼어난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주대 시인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김주대 시인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에서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대해 우리나라 최고의 법 전문가 집단인 대법관들이 사상 초유의 전원반박성명을 낸 것과 관련, 이들을 비판하는 격문형태의 장시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발표했다. 김주대 시인에게 허락을 득하고 시의 전문을 싣는다. 만약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법관이 아닌 자신의 전문성에 빗대어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뼈를 때리는 북한 아나운서의 말보다 더 아프게 마음을 베일 것이다. 


<반박 성명 발표한 대법관 13인에게 고함>

 김주대


너희들 고운 손 깨끗한 피부 다칠까봐

땅 파고 농사짓는 일, 바닷바람에 살점 파먹히며 물고기 잡는 일, 공장 돌리는 일은 우리가 하였다.

영하 20도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 농성하는 일은 우리가 하였다.

촛불 들고 언 손 불며 청와대로 행진하는 일은 우리가 하였다.

 

너희들 판결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될까봐

너희들은 판결에만 전념하라고

비린내 나는 생선은 우리가 팔고

육중한 기계음 들리는 공장 컨베이어벨트는 우리가 지켰다.

너희들 월급 받아 판결 잘해 달라고

나라에 꼬박꼬박 세금 바쳤다.

 

너희들이 빵 한 조각 훔친 아이는 징역을 보내고

수백억 갈취한 파렴치범은 집으로 돌려보낼 때

너희들 지위를 지키며 겸손한 척 더러운 판결을 내릴 때

너희들 좋은 머리 아플까봐

너희들의 판단이 맞겠지 하며

첫 버스를 타고 출근하여 막차를 타고 퇴근하였다.

 

우리는 농사 전문가

우리는 기계 전문가

우리는 노동 전문가

우리는 알바 전문가

우리는 예술 전문가

우리는 장사 전문가

우리는 사무 전문가

우리는 택시 전문가

우리는 버스 전문가

우리는 서비스 전문가

우리가 판단하는 것보다

법 전문가 너희들이 더 잘할 것이므로

우리는 못하니까

우리는 법을 못 배웠으니까

기꺼이 너희들을 인정하며 너희들에게 법의 칼을 쥐어주었다.

너희들 법복 앞에 떨며 서서

때로 꾸중도 듣고

시키는 대로 감옥에도 가고 벌금 내며 살았다.

 

우리는 환경미화 전문가

너희들이 버린 쓰레기가 너희들을 더럽힐까봐

너희들 눈에 띄지 않게 치우고 줍고

너희들이 화장실에서 묻혀온 더러운 발자국을

대법원 복도마다 소리 없이 지워주었다.

우리는 위생 전문가

너희들이 싼 똥이 너희들을 더럽힐까봐

너희들이 싼 똥 냄새가 너희들 법전을 더럽힐까봐

너희들 눈에 띄지 않게 수거하여 먼 바다에 뿌려주었다.

너희들이 죽어도 못 하는 일

우리가 살아서 다 해주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라고

우리는 언 땅에 서서 두 손 호호 불며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야간 근무를 하였으며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고

과로로 죽었고

뿔뿔히 흩어진 가족들 살 길 찾다 죽었다.

절망으로도 죽고

희망으로도 죽었지만

 

사법권은 그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독립되었다고 믿고

법은 너희들에게 맡겼다.

아니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희들과 다른 우리의 일을 해야 하니까

너희들이 결코 못 하는 일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못 하는 일은 너희들이 하라고

너희들에게 맡겼다.

 

너희들이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하여도

우리의 노동

우리의 예술

우리의 사무

우리의 아르바이트

우리의 장사

우리의 눈물로부터

아니 우리가 낸 세금으로부터 우리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너희들은 우리가 언 손 불며 돈 벌어 월급 주며

우리가 고용한 알바생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개 숙였다.

너희들은 우리가 법의 이름으로 고용한 알바생들이다.

그래서 따랐고 인정했고 심지어 복종했다.

너희들은 우리 국민들이 고용한 임기 6년의 장기 알바생들이다.

 

대법원장인 법관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은 대법관이 된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 대통령을 우리가 뽑았다.

 

너희들의 위에 법이 있고 법 위에 우리가 있다.

 

(건방진 놈들)



@Back2Analog

  1.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서문 중 [본문으로]
  2. 역사적으로 토머스 홉스,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등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노동에 의한 가치의 규정을 논의했지만 이론적 체계를 갖춘 노동가치론은 애덤 스미스가 처음으로 제시했다.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노동가치론은 맑스가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며 따라서 유일한 이윤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3. 라오콘은 그리스⋅로마 신화 중 트로이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로, 트로이 목마의 정체를 폭로하려다 분노한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뱀, 퓌폰에 의해 그의 두 아들과 함께 깔려 죽는다 [본문으로]
  4. 프레디 머큐리가 오페라에 관심이 있었다면,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Brian May)는 하드록이나 째즈에,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Roger Taylor)는 뉴웨이브, 베이시스트 존 디콘(John Deacon)은 펑크록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전상진·김무경. 2010.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사회와이론󰡕. 통권 제17집. [본문으로]

Comments

  • 김대일 | 댓글주소 | 수정/삭제

    훌륭한 글 잘 읽었어요 멋지십니다^^

  • 황순식 | 댓글주소 | 수정/삭제

    공감하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전문가로 살아가기가 아직은 좀 힘들기도 하군요.ㅎㅎ
    전문가의 시대가 지내가리라고 생각하지만,
    4차 혁명(?)과 세상의 변화에 대한 뜬구름잡는 이야기들을 보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것 같습니다.
    비전문가의 삶이 더 행복하고 멋질 수 있다는 사례를 많이 만드는 것,,
    저부터 그걸 해 가야 할 거 같습니다.ㅎ

    • Back2Analog | 댓글주소 | 수정/삭제

      한 명의 비전문가로 살아가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전문가의 전문성은 전문성의 밥그릇이 아니라 시민의 상식으로 작동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쓴 글입니다. 직접 민주주의의 첫 징후는 집단지성의 부각이었다 생각합니다. 전문성에 기대는 것보다 시민의 품에 기대는 것이 인류를 위해 더 안전하다는 의미구요. 대학 때 시위 전문가로 짱돌을 던지다가도 전경한테 쫓기면 안전한 시민 속으로 숨지 않았던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