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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교육에 대한 엉뚱한 질문들

인생의 종착역은 어차피 "치킨집"

by Back2Analog 2019. 3. 9.

이 대사가 어디서 나왔는지 가물가물했는데, 드디어 찾았다! 연기파 배우 윤제문과 영화를 보는 내내 윤은혜인줄 알았던 정소민이 주연한 영화, "아빠는 딸"…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 필자의 딸은 사춘기에 접어들긴 했지만, 중학교 입학 전이라 영화를 보면서도 필자 얘기가 아니라 안드로메다에 있는 스또리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영화!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어른이 되면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딸과 찍었던 어렸을 적 비디오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윤제문… 현실이 행복하다면 과거 비디오를 보며 눈물이나 짜고 있겠는가? 현실 속 사춘기 딸은 자신의 속옷을 아빠 속옷과 같이 빨았다고 엄마한테 짜증을 내는가 하면, 아빠와는 눈도 안 마주치고, 출근과 등교길에 지하철도 각각 다른 칸에 탄다. 아! 감정이입 팍팍 된다. 그 정도까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늘 존재 그 자체가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그건 내가 나를 성찰할 때 하는 얘기고,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더더더더군다나 그 대상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라면…


# 아빠 : 도대체 뭐가 문제야? 얘기 좀 들어보자. 도연아, 아빠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주잖아. 그냥 공부만 하라는 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대학만 붙어! 연애? 그거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빤 네 나이 때 사전 씹어 먹으면서 공부했어. (딸이 헤드폰을 뒤집어쓴다.) 그때 연애질 하던 놈들 지금 뭐하는지 알아?" 아빠 말 하는데… 야, 헤드폰 안 빼? 헤드폰을 강제로 빼, 바닥에 떨어진다. 망가진 헤드폰… ㅠㅠ)
도연아, 너 아빠 밖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아? 네가 아빠 인생을 딱 하루만 살아보면…

# 도연 : 나도, 나도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아빠도 내 인생 한번 살아보면 그렇게 쉽게 말 못할걸? 그냥 공부만 하라고? 진짜 어이가 없네. 아빠가 한 번 해 봐바, 그게 가능한지!

# 아빠 : 아빠 말 아직 안 끝났어 

# 도연 : 지겨워 죽겠어, 진짜 어린애 취급 좀 그만해!

# 아빠 : 너 어디서 아빠한테 성질이야~ (버럭) 아유~

# 도연 : 아유~ 

# 할아버지 : 다 싸웠어? 그거 알어? 이 은행나무가 천 년이 넘은 나무다 그말이지.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 밑에서 소원을 빌면 그게 다 이루어진… 나 지금 누구랑 얘기허냐?


집으로 돌아가던 아빠와 딸은 교통 사고가 나 병원에 입원한다. 눈을 뜬 아빠와 딸, 그런데 아빠와 딸의 몸이 바뀌었다. 천 년 묵은 은행나무가 아빠와 딸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아빠와 딸의 소원대로 아빠는 교복을 입고 학교로, 딸은 양복을 입고 회사로 출근한다. 딸의 친구 얼굴을 알 리 없는 아빠는 참하게 공부만 하는 짝이 1등이라고 생각한다. 시험 결과가 나오고, 그 짝이 꼴등을 하자. 딸의 모습을 한 아빠는 울고 있는 짝을 위로한다.


# 아빠 : 경미야, 왜 그래? 답안지 밀렸어?

# 경미 :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야? 나 맨날 꼴찌잖아. 어차피 난 뭘 해도 안돼… 흑

# 아빠 : 괜찮아. 너, 저기 해, 핵 열심히 했잖아.

(도연의 절친, 진영이 다가오며)

# 진영 : 야, 솔직히 지금보다 어떻게 더 열심히 하냐? 야, 안경미 공부하지 마. 뭐 적성이 아닌가 보지.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해 봤자 뭐하냐? 아차피 인생의 종착역은 치킨집인데… 인문계, 경영대학, 대기업, 치킨집! 자연계, 공대, 대기업, 치킨집!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거 실컷 하다가 우리집 치킨 가게나 물려 받을라구~

# 아빠 : 그래, 네 말이 맞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이 사회를 얼마나 불공정한 지옥으로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건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다. 무관심과 무능의 문제다. 지금은 열심히 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면 그 노력에 열매로 보답하는 농경사회가 아니다. 하지만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농경의 유전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근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단순히 열심히 살면, 그 결과 빛나는 성공이 우리를 맞이할까? 오죽하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겠는가! 이 사회를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는 모르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아이들은 알고 있다. 자신이 노력이 반드시 그에 걸맞은 필연적 결과인 성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보의 빅뱅과 불확실성의 가중으로 결과는 노력이라는 필연보다 운이라고 하는 우연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아졌다. 아니, 노력과 무관하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우연의 결과를 실력과 노오력이라는 필연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맑스가 지적했던 자본이 문제가 아니라 자산의 되물림이 불평등과 그 양극화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행운이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이보다 확실하게 구분하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적대로, 비슷한 재능으로 비슷하게 노력하는 다른 수많은 사람은 왜 그만큼 부를 이루지 못할까?[각주:1]


@Back2Analog

  1. 로버트 프랭크(Robert H. Frank). 2018.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정태영 역. 글항아리. p.10/14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