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장, 교육에 대한 외부서술

2000년, OECD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에서 대한민국은 핀란드에 이어 당당히 2위를 차지했다. 2009년,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취임 후 미국의 21세기 교육정책 구상을 제시하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교육 사례를 두 차례나 언급했다.[각주:1]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중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교대와 사범대로 진학해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임용고시라는 시험을 뚫고 교사가 된다.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헌신적이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교육은 안녕한가?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PISA의 평가와 무관하게, 그리고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부러워하는 것과 달리 안녕하지가 않다. 외국에서는 그렇게 칭찬해마지 않는 대한민국 교육에 대해 만족해하는 국민들이 많지 않다. 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도한 업무와 책임으로 인해 갈수록 탈진 상태에 빠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교육비를 버느라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그뿐인가? 교육의 중심에 서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는 10년째 자살인 것으로 조사됐다.[각주:2] 이쯤 되면 외국에서 대한민국 교육을 부러워한다고 마냥 우쭐해 할 일이 아니다. 최고의 교사가 가르치고,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학부모들의 어마어마한 지지와 헌신 속에서 학생들은 가장 많은 시간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혹시, 아니 설마 이 모든 것이 문제 아닐까? 뛰어난 교사와 부모의 헌신, 그리고 공부에만 몰두하는 학생 말이다. 필자는 한때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 했던 적이 있다. 다음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평소 책을 가까이하지 않던 필자가 출판사에 들어간다고 하자 필자를 잘 알고 있는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다.


친구 : 너처럼 책 안 읽는 애가 무슨 출판사냐? 괜히 국문과 망신시키지 말고, 다른 직장 찾아봐!

필자 : 나처럼 책 안 읽는 사람도 읽고 싶은 책을 만들 거다, 왜!


친구들의 핀잔을 피하기 위해 대충 던진 답이지만, 혹시 이 말도 안 되는 대답 속에 대한민국 교육 문제 해결의 열쇠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잘 해야 될 수 있는 교사가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교사의 전문성이 문제라면 교사는 과연 자신의 전문성을 포기할 수 있을까? 1장에서 언급한 전문성의 3요소를 교육에 대입해 보자. 우리 사회는 교사에게 교육에 대한 역할과 권한을 위임했다. 그리고 교육의 모든 역할과 권한을 위임한 대신 교사에게 마치 신에 준하는 책임을 요구한다. 오죽하면 교사들은 교육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책임의 전가에 대해 “교사에게 나라를 구하라는 거냐”라고 항변한다. 국가가, 그리고 국민이 교사에게 나라를 구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무리한 책임을 전가했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접근은 2부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다음은 대한민국의 학부모를 한번 살펴보자. 만약 올림픽에 자녀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헌신성 분야가 있다면 금메달의 영광은 단연 대한민국 학부모의 몫일 것이다. 


자녀 잘되라고 부모가 물심양면 지원하는 것이야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그렇다고 달리기 경주처럼 하지는 않는다. 육아를 시합하는 한국인들은 정신 자세부터가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목표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기록은 늘 경신되기 마련이다. 모두의 목표가 상향 조정되니 이 그룹의 평균치는 상승한다. 평소처럼 하던 사람은 한순간에 ‘안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면 ‘도태된’ 느낌이 들 뿐이다. 그러니 ‘남들처럼’만 해도 다른 사회에서는 혀를 내두른다(오찬호, 2018: 37/150).[각주:3]


결혼을 한 부부는 사랑의 결실로 자식을 잉태한다. 그리고 10달 동안 뱃속에서 조심스레 아이를 키운다. 엄마는 육체적인 불편함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아내의 임신과 동시에 대부분의 예비 아빠들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쫓기게 된다. 부모는 자식을 낳은 후 마치 인간을 창조한 신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부모는 자신의 피조물인 자식의 미래를 자신의 경험 안에 가두는 육아를 시작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첫 번째, 아이를 낳는 생물학적 행위는 부모가 노력해서 얻은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처럼 진화의 주체는 인간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며 인간은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기계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이미 주어진 능력으로 자식을 낳은 후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너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이러한 유전자 보존을 인간만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가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긴다. 다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지극히 생물학적 행위에 권력 관계라는 독특한 문화가 덧씌워진다. 다음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이다. 


사홍 : 어떻게 한 번을 안 져, 한 번을! 민황후께서 일찍 돌아가신 연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애신 : 나라에 힘이 없어서가 아닐런지요.

사홍 : 틀렸다. 양이를 가까이 하시더니 국사를 간섭하시고 임금의 일에 나선 까닭이다

애신 : 조선은 변하고 있습니다.

사홍 : 틀렸다. 조선은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하고 있는 것이다.

애신 : 달에 한 번 기별지만 읽겠습니다. 천민도 신학문을 하여 벼슬을 하는 세상이온데 계집이라고 하여 어찌 쓰일 곳이 없겠습니까?

사홍 : 쓰이지 마라! 아무 곳에도 쓰이지 말라 이러는 것이다. 계집의 학문이 그만하면 되었다. 기별지는 허락 못한다.

애신 : 싫습니다.

사홍 : 싫어?

애신 : 청이고, 법국이고, 덕국이고 앞다투어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왜인들은 쌀까지 퍼갑니다. 조선의 운명이 이럴진데...

사홍 : 이러니 금하는 것이다. 이러니... 이 나라엔 왕이 없다더냐? 조정 대신들이 없어? 아니 설사 다 없어도 넌 안된다. 이 집안에서 조선의 운명 걱정은 니 애비, 니 큰 애비로 되었단 말이다. 단정이 있다가 혼인하여 지애비 그늘에서 꽃처럼 살란 말이다. 나비나 수 놓으며 살아. 화초나 수 놓으며 살아. 그게 그리 어렵단 말이냐?

애신 : 그럼 차라리 죽겠습니다.

사홍 : 그럼, 죽어라!


<미스터 션샤인>은 일본과 서구의 개화 압력에 놓이게 된 1900년대 초 조선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의 뿌리가 과거에 있었던 흥선 대원군은 개화를 반대하지만, 새로운 권력이 필요했던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개화를 추진하다 일본에 시해를 당한다.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고애신’은 자신이 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몰래 기별지를 읽지만, 자신이 살아온 과거가 반복되기를 바라는 ‘고사홍’은 그러한 손녀, 고애신에게 차라리 죽으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고사홍의 말이 진심은 아니다. 이 상황을 현실로 가져와 보자.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미래는 과거와 다를 것이라는 자녀의 관점과, 미래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부모의 관점. 문제는 경제적 자립을 통해야만 독립된 자아로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인간 사회의 특성상 부모와 자식의 주장 사이에 권력의 비대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장에 권력이 작동하면 옳아도 옳은 것이 아니며, 틀려도 틀린 것이 아니게 된다. 

인간이면서 마치 신에 준하는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부모와 그 책임 안에서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자식 사이에는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존재한다. 부모 입장에선 자식에 대한 기대로 인해 행복을 느끼며 그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한다. 그 기대와 기대에 반드시 부합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행은 부모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자식은 자신의 미래와 무관한 부모의 기대와 그 기대의 집단적 합인 소위 입시 경쟁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모가 제공하는 경제적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뛰어난 교사와 헌신적인 부모,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교육이 불행한 이유는 그 수고로움의 ‘결과’를 외부에서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선한 의도는 악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일까?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밝혔듯, 우리는 모두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게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으며 나는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 뽑고자 한다(막스 베버, 2011: 227).”[각주:4]고 주장하고 있는 신념윤리가인지 모는다. 베버는 신념윤리와 더불어 신념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를 강조했다. 교육 주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선한 의도가 대한민국의 교육을 불행으로 내모는 악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선한 의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을 교육의 체계 밖에서 살피는 외부서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내부적 관점(internal point of view)”과 “외부적 관점(external point of view)”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서술 방식은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기능 분화의 결과다. 배타 분화된 근대사회의 각 부분 체계는 이중적 서술의 대상이 된다. 기능 체계의 소속원으로서 성찰이론은 내부적 관점에서, 무소속인 사회학은 외부적 관점에서 각 부분 체계를 관찰한다. 체계의 자기서술에서 나타나는 대상과 서술자(성찰이론)의 관계는, 루만이 표현한 바처럼, “충성과 긍정의 관계”다. 자기서술은 “각 기능에 상응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회의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서술의 중요한 쓰임새는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능체계의 정당화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체계의 자기서술, 즉 교육의 성찰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 ‘모든’ 것이다. 다른 기능 체계의 자기서술과 마찬가지다. 자기서술에서 묘사되는 각 기능은 세상의 중심이자 대체 불가능한, 즉 비교 불가능한 사항임을 확인하며 모든 논의가 출발하는 동시에 종결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서술들은 서로 통합·화해 불가능하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각주:5]


제2부 ‘교육에 대한 엉뚱한 질문들’에서는 교육을 교육의 주체나 전문가의 입장으로 자기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한 의도가 만들어 놓은 악한 결과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외부서술할 것이다. 1장에서도 밝혔듯, 교육은 교육의 이해당사자인 교육전문가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제2장에서 밝혔듯, 교육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영향력이 큰 사회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육의 3주체가 교사, 학생, 학부모라는 견해를 부정하는 입장이지만,[각주:6] 각각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입장을 중심으로 교육을 외부서술한 후, 다양한 전문사회학(professional sociology)을 품고 있는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의 관점으로 전문사회학의 한 분야인 교육학(pedagogy)을 살필 것이다. 

공공사회학과 전문사회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하자면, 공공사회학인 사회학과 전문사회학인 교육학의 관계는 마치 자연과학과 물리학의 관계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인류는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과학을 발전시켜 왔다. 고대 천문학과 역학에서 비롯된 자연과학은 건축, 생물, 지리 등 시대적 필요에 따라 자연과학을 분화, 발전시켜 왔으며, 산업혁명을 이끈 과학혁명은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이 견인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사회과학의 분화와 발전으로 이어진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 행정 등 다양한 전문성의 분화가 이루어졌으며, 전문사회학은 그 각각의 전문성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기능체계가 배타 분화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부분체계를 정당화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부분체계의 일부로서 분과가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교육체계의 예로 보면, 가족에서 벗어난 교육이 개인과 국가 사회의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배타 분화된 교육 체계의 자율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된다(Luhrmann, 2002 : 특히 7 장), 사회적 인정의 틀 위에서 교육 체계의 행위와 활동 조직, 제도들 만들고 확대 할 수 있으며 (공급자 측면), 이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창출 될 수 있다. 교육학은 교육을 정당화하여 교육이 사회적 인정과 동의를 받아 성장⋅발전⋅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호를 창출하고 이에 대한 사회의 신념을 끌어낸다. ‘우리 모두의 번영을 위해 교육은 꼭 필요하다!’ 과학이 종교나 정신과학(철학)을 대신하여 사회적 인정과 동의를 받는 중요한 문화가 된 이래, 각 분과는 과학성을 추구하는 형태로 과학 체계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고, 이에 따라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외피를 벗고 ‘교육과학’으로 탈바꿈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0-241).[각주:7]


사회학이 특정한 분야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공사회학이라면, 전문사회학은 공공사회학을 구성하고 있는 정치학, 경제학, 교육학, 행정학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사회학인 정치, 경제, 교육, 행정학 안에도 공공사회학의 명칭을 딴 정치사회학, 경제사회학, 교육사회학, 행정사회학 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쓸모는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다. 이를테면 전문사회학인 교육학 범주에 속해 있는 교육사회학은 사회학의 일반적인 요구로부터 자신의 전문성을 방어하기 위해 작동한다면, 공공사회학의 범주에 속해 있는 교육사회학은 전문사회학인 교육학에게 교육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답을 요구한다. 교육을 외부서술하고자 하는 필자의 관점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 박종률. 2009. “오바마 “한국교육 배워라”” 󰡔노컷뉴스󰡕 (3/11). http://bitly.kr/VHaCv (검색일: 2019/3/10) [본문으로]
  2. 이에스더. 2018. “한국 청소년 사망원인 1위 자살…4명중 1명 “심각한 우울 느낀다” 󰡔중앙일보󰡕 (4/26). http://bitly.kr/CLLOr (검색일: 2019/3/24) [본문으로]
  3. 오찬호. 2018.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휴머니스트. eBook. [본문으로]
  4. 막스 베버(Max Weber). 2011.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최장집 역. 후마니타스. 2판 2쇄. [본문으로]
  5. 전상진·김무경. 2010.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사회와이론󰡕. 통권 제17집. [본문으로]
  6. 이 견해에 대해서는 2부에서 구체적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7. 전상진·김무경. 2010.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사회와이론󰡕. 통권 제17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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