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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교육/교육에 대한 엉뚱한 질문들

교육의 자주성에 대한 질문

by Back2Analog 2022. 4. 3.

  원고는 지난 3 22 국회의원 안민석권인숙 의원 주관으로 열렸던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  지원법 제정 방안 토론회"에서 발표했던 “발칙한” 토론문입니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만약 곧 죽을 상황에 처했고, 목숨을 구할 방법을 단 1시간 안에 찾아야 한다면, 1시간 중 55분을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사용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아인슈타인이 아닌 나는 나에게 주어진 10분의 발표 시간 대부분을 그저 질문하는 데 사용할까 한다. 한낱 개인인 토론자가 교육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확신에 찬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序 : 교육에 자주성이 있을까?

모든 개념은 정의와 인식 사이의 괴리가 존재한다. “거버넌스”만 하더라도 행정학, 정치학, 사회학 관점에서의 인식이 모두 제각각이다. 행정학은 일반적으로 행정의 효율성 측면에서 거버넌스를 살핀다. 정치학은 - 당연하게도 - 거버넌스를 통치의 원리로 인식한다. 그래서 보다 명징한 “협치”라는 단어를 선호한다(채희태, 2020: 13). 공공 사회학(public sociology) 관점의 거버넌스는 전문 사회학(professional sociology)인 행정학이나 정치학에 비해 패러다임이 넓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개념 정의 또한 모호하다. 필자는 2019년 “교육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 사례 연구”에서 거버넌스라는 개념의 모호함을 “특정한 주제와 관련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민·관의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채희태, 2019: 17).

 

거버넌스보다 훨씬 더 친숙한 개념인 “자주성”은 그 친숙함으로 인해 오히려 자의적 해석이 난무한다. 이른바 친숙함이 주는 함정이요, 쉬운 한글이 제공해 온 오래된 역설의 하나다. 한글로 쓰여진 개념을 쉽게 읽어냄으로써 그 복잡 미묘한 개념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은 이내 확신으로 이어진다. 그 확신이 교육과 만나면 바야흐로 거역할 수 없는 종교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4항에 명기된 소위 “교육의 자주성”이 그러하다. 자주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자의적 해석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주성”이라는 단어가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네이버와 다음 사전을 찾아보았다. 네이버와 다음 사전에서는 자주성을 공히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

 

그렇다면 교육의 자주성이란 교육이 사람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토론문을 작성하기 위해 참조한 “지속 가능한 교육청-지자체 협력체제 구축을 위한 제도적 지원방안 연구”에도 “교육의 자주성”이라는 말이 8번이나 등장한다. 가치중립적으로 헌법 제31조 4항을 소개한 부분도 있지만, 교육의 자주성에 대해 마치 종교처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이 인격화된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헌법이 교육에게 자주성과 더불어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그리고 대학에만 국한된 자율성을 부여한 것은 특별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시대적 맥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위 연구에서도 8번 중 3번은 교육의 자주성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교육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원리로써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이 보다 앞서다 보니 민주성의 가치가 다소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음. 그동안 교육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적 위치와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 교육자치 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음. 한편으로 교육의 전문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일반행정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교육자치 제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음(김용련 외, 2021: 47).

 

교육자치를 위한 자주성이라는 원리에 입각해 일반행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영역을 고수하면서도 일부 사업을 위해 협치해 달라는 교육청의 요청이나, 학교가 교육의 전문성을 강조하면서도 마을교육을 위한 지역의 협력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지역사회나 지자체가 언제나 호의적일 수는 없음. 오히려 교육자치 영역이 자기중심적이라는 인식으로 굳어질 수 있음(김용련 외, 2021: 48).

 

한편,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교육행정기관과 일반행정기관 간 연계협력을 추진하더라도 기본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바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지방교육 자치제도의 본질임. ­즉, “교육자치와 일반자치 간의 연계는 교육의 자주성이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강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김흥주 외, 2006: 17). 따라서 지방교육자치제도의 본질을 침해하는 연계・협력의 법제화 또한 있을 수 없음(김용련 외, 2021: 115).

 

교육의 자주성이 애초의 취지와 무관한 의도로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교육의 자의적 해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을 통해 “거버넌스적”으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 낼 필요가 있다. 비인격체인 교육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속 자주성을 부여할 것인지, 아니면 마을교육공동체를 위해 오랫동안 지켜온 교육의 자주성을 내려놓을 것인지…


2. 本 : 이어지는 질문들…

 

교육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니클라스 루만이 『사회의 교육체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특정한 맥락에서 시작된 모든 사회체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확대 재생산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이철, 2017: 188).

 

교육체계의 자기 서술, 즉 교육의 성찰 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 ‘모든’ 것이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 요약).

 

교육은 애초에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태초에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를 위해 마을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마을의 유지나 성장을 위해 교육이라는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18세기에 시작된 근대교육이 대표적이다. 시민혁명에 성공한 부르주아지는 혈통에 의해 지위가 계승되었던 중세의 계급 질서인 귀속 지위에 반대해 후천적으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성취 지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헤르만 기섹케, 1993: 28). 이른바 근대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탈근대를 향하고 있는 현재, 근대교육은 과잉된 지위 쟁탈전으로 인해 소위 능력주의*(ableism)를 앞세우며 빠르게 수단에서 목적으로 이동 중이다.

 

* 한국에서 소위 능력주의는 서로 정반대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운도 실력이라고 주장하는 ableism이고, 다른 하나는 실력도 운일뿐이라는 meritocracy이다.

 

입시를 위해 정해진 답을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해 온 대한민국 교육은 질문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중학생이었을 때 한 친구 녀석이 영어 선생님께 “어금니”가 영어로 뭔지 물었다. 선생님은 당당하게 “몰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 스스로 자주성을 가지고 목적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교육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교사라고 할 수 있다. 작년 대학원 수업 시간에 한 원생이 발표를 마치고 교사가 교육혁신의 주체인지, 아니면 걸림돌인지 필자를 콕 찝어 견해를 물은 적이 있다. 난 교사를 교육혁신의 주체로 세우는 순간 동시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과거와 다르게 빠른 시대변화로 인해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의 짐을 교육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교사에게 지우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만난 한 교사는 "교사에게 나라를 구하라는 거냐"며 항변하기도 했다. 만약 교육이 목적이라는 짐을 덜어낸다면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수단인 교육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힘을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체인가 이해당사자인가?

교육과 관련해서 자주성이라는 단어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주체이다. 주체라는 단어는 비단 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거버넌스 영역에서 맹활약 중이다. 주체(主體)를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몸의 주인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몸은 오로지 자신의 몸밖에 없다. 요즘은 내 몸에서 나온 자식한테도 ‘일’해라, ‘절’해라 할 수 없는 시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누구나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대한민국을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주체라는 말에 그 어떠한 기대도, 집착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주체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체라는 말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내 몸 하나 어쩌지 못하게 되자 생겨난 모종의 욕망 같은 것은 아닐까?

 

“이해당사자”라는 개념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주체에 비하면 매우 낯선 단어다. 그래서 다소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10명이 힘을 합해 소를 한 마리 잡았다(고 치자). 그 소를 분배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 소를 잡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소를 잡기 전에 합의에 의해 분배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 10명 중 소를 잡는 데는 참여했지만, 소의 분배 방식이나 권한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주체는 모두일 수도 있고,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소를 분배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체이지만,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소의 분배를 결정할 수 없으니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이 폭력이든 합의든 소의 분배 방식이 결정될 때까지 10명은 모두 소(stake)를 잡(hold)고 있는 사람(er), 즉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 존재한다. 소를 교육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교육의 주체는 누구일까? 그것이 신념이든, 지식이든, 아니면 돈이든 우리는 모두 교육의 이해당사성을 가지고 교육 거버넌스에 참여한다. 공과 사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대중들이 고민 없이 동의한 결과이다. 우리는 판사에게 독립된 헌법 기관이라는 공적 권한을 위임했지만, 판사 또한 자신의 사적 감정을 완벽하게 배제할 수 없는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교육의 주체인 동시에 이해당사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교육을 보다 공정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를 교육의 3주체라고 이야기한다. 학생은, 교사는, 그리고 학부모는 진정한 교육의 주체일까? 주체로서 교육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을까? 학생이든, 교사든, 학부모든, 그리고 마을교육공동체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지역사회든 그저 이해의 당사자일 뿐이라는 주체 파악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

 

교육자치에 대한 오해?

1995년 35년 만에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했다. 그리고 2006년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의 개정되면서 교육감도 시민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교육자치가 교육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하고, 확대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교육 전문가들이 모여 교육감을 뽑는다면 모를까, 시민이 직접 교육감을 선출하는 교육자치는 오히려 교육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시민의 상식에 맞게 해체하는 것에 더 가깝다.

 

일반자치는 오랫동안 시민의 요구와 무관하게 작동되어 온 일반행정의 전문성이 시민의 상식에 맞게 작동할 수 있도록 일반행정의 인사권과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대표를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자치는 시민이 직접 투표를 통해 선출한 교육감이 시민의 상식과 어긋나고 있는 교육행정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다. 즉, 교육감은 교육 전문성을 대표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민이 가지고 있는 교육의 상식을 대변하는 자리다.  

 

동시에 몇 년 전부터 다른 한쪽에서는 교육감 직선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고 있다. 양보와 타협을 통한 합의보다는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 성장해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신념과 가치를 기준으로 진영을 먼저 나누는 것에 익숙하다. 유일한 대화가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 시대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를 반지성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고 있다(손호철, 2019).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껍질 속에 숨어 지내는 갑각류보다 피해를 감수하고 내부에 골격을 세운 포유류의 진화 속도가 더 빨랐던 이유는 상호작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알베르 자카르, 1999: 201-202). 그것이 개인과 개인의 경계든, 아니면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의 경계든 소위 자치라는 것이 외부와의 완벽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함께 공존해 나갈 수 있다.


3. 結 : 질문을 마치며…

모든 것은 양가성을 지닌다. 부정성의 이면에 긍정성이 숨어 있고, 긍정성의 이면엔 부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2015년 김영란법이 제정되었을 때 난 대한민국이 보다 청렴해질 것이라는 기대와, 법에 대한 의존성이 지나치게 높아질 것에 대해 우려를 동시에 했다. 건강한 사회는 갈등이나 다툼이 있을 때 가급적이면 법이 중재하지 않아도 원만하게 합의를 할 수 있는 사회다. 하지만 상식의 발걸음이 시대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면서 법의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혹시 김영란법이 만든 나비효과가 돌고돌아 검찰 출신 대통령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그저 질문일 뿐이다.

 

법과 제도의 역설

법과 제도는 확고한 경계를 만든다.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의 분리도 교육에 대한 변화된 시대 인식과 무관한 법이 만든 경계다. 법에 대해 무지한 필자는 모든 경계를 아우를 수 있는 법은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헌법은 시대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담고 있다. 1972년 유신헌법이 그랬고,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으로 개정된 현행 헌법 또한 그렇다. 법 위의 법인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굳이 세세하게 사람과 사람, 책임과 책임 사이의 경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칸막이만 양산하는 하위법을 만들기 이전에 헌법이 가리키는 방향에 맞게 시민과 행정이 상식적인 합의를 향해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은 지나친 낭만일까? 혹시 그 느린 속도와 지난한 과정을 스킵하고 싶은 우리의 조급함이 법을 통해 간편하게 질러가고자 하는 욕망을 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법은 소수의 전문가를 넘어 모두가 이해당사자로 참여할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열 열사가 분신하면서 외쳤던 말이 “근로기준법을 만들라!”가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그런 법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혹시라도 마을교육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법안이 1970년 근로기준법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하는 말이다.

 

경직되고 단일한 “전달”체계에서 유연하고 다양한 “지원”체계로

김대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통일 방안을 고민해 온 끝에 2000년 김정일 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통일방안을 6∙15 공동선언에 담았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흡수한다는 방안은 다른 한쪽을 불안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일반자치와 교육자치 또한 옳다, 그르다는 가치를 들이대 어느 한쪽으로 통합하기엔 그동안 따로 걸어온 역사와 경험이 결코 짧지 않다. 제도가 만들어 놓은 책임의 경계로 인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일반자치와 교육자치를 만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혁신교육지구였다. 혁신교육지구는 혁신학교의 행∙재정적 지원이라는 교육자치의 일방적인 목표로 시작했지만,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일반자치와의 합의를 통해 마을교육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양병찬 외, 2019: 54). 마을교육공동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육부에서 정책을 결정해 아래로 전달하는 “전달체계"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지원할 수 있는 “지원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혁신은 변방에서 시작되고, 얼음은 가생이부터 녹는다. 중앙은 다양한 불확실성에 대응할 정도로 유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경직된 대응이 모든 현장의 다양성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이 각각 현장에 지원한 예산의 통제권을 현장에 내어줄 수만 있다면,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의 중앙 단위 거버넌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심하고 주저하기

우리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입이 부르트도록 이야기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다. 그 당연한 말에 모두가 고개만 끄덕일 것이 아니라 그 말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오징어처럼 끈질기게 씹고, 또 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말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난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하나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하나의 우주다.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듯, 우리는 한 명의 아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끝을 가늠하지 못한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경계를 특정할 수 있는 마을이 아니라 무한대의 우주를 뛰어넘는다.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해당사자가 아닌 교육의 유일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중심에 세워야 한다. 조한혜정의 말처럼 급변하는 전환기일수록 젊은 세대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고, 그들이 기존 사회의 문제를 인지하고 풀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조한혜정. 2010).

 

필자가 던진 이 하찮은 질문은 그저 교육이라는 호수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일 뿐이다. 내가 던진 돌멩이가 강철 같은 교육에 부딪힌다면 튕겨 나와 나를 다치게 할 것이고, 약하디 약한 유리창 같은 교육에 부딪히면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이는 모두 필자의 의도가 아니다. 필자는 그저 교육이라는 잔잔한 호수에 작은 파문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모쪼록 필자의 이 엉뚱한 질문이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참고한 자료

김용련 외(2021). “지속 가능한 교육청-지자체 협력체제 구축을 위한 제도적 지원 방안 연구”. 교육부.

양병찬 외(2020). “혁신교육지구 사례 분석을 통한 마을교육공동체 체제 구축 방안 연구”. 세종: 교육부.

손호철(2019). “반지성의 사회 대한민국”, 『한국일보』, (3/25).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3241008765490>

이규석(2022). “지방교육자치 교육감 직선제 폐해가 심각하다”.

이철(2017).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이론적 세계사회 분석”.  『사회와이론』, 30, 171-210.

조한혜정(2010). “후기 근대 세대 간 갈등과 공생의 전망: 1990- 2000년대 한국 사례의 교훈”. 『인문과학』, 92, 87-117.

전상진·김무경(2010).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사회와이론』, 17.

채희태(2019). “교육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 사례 연구”. 『교육연구』, 34(1), 1-42.

채희태(2020). “범람하는 거버넌스에 관한 小考”. 『NGO 연구』, 15(1), 1-42.

Giesecke, Hermann(2002).  『근대교육의 종말』. 조상식 역. 내일을 여는 책.

Jacquard, Albert(1999).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실』. 장혜영 역. 동문선.